제27일 : 뜨리아 까스뗄라~사리아(18.3km),4시간 30분
2019년 10월 15일
점점 일어나기가 싫어진다.하룻밤에 두어번씩은 꼭 깨곤 했는데,아침까지 내처 자는데다 일어날 시간이 됐는데도 침낭안에서 꼼지락거리는 날이 많아졌다.
누군가 코고는 소리도,새벽녘 부스럭거리는 소리도,화장실 오가는 소리도 이젠 자장가로 들릴 뿐이었다.
오늘부터 언니가 걸어보기로 했다.
그동안 많이 힘들고 답답했을텐데,무릎이 회복되어 정말 다행이었다.
7시 30분 출발..
흐리기만 했을뿐 다행히 비는 안왔다.
처음부터 빗속에서 출발하는건 정말이지 피하고 싶은 상황이라 천만다행이라 여겼다.
마을끝에 위치한 `pepe`라는 cafe에서 사모스 루트와 산실 루트로 나뉘었는데,산실코스를 택했다.
사모스 루트는 7킬로 가량 더 멀지만 평지길이고 사모스 수도원을 지나는 루트였고,
산실 루트는 짧지만 가파른 산길이 있는 루트였다.
아스팔트길을 따르다 바로 숲길로 들어섰는데,숲은 아주 울창했다.
이끼로 둘러쌓인 고목들이며 빼곡한 숲은 마치 정글숲에 들어온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는데,
이곳이 얼마나 비가 많고 습한 지방인지를 다시금 실감나게 만들었다.
걸은지 한시간쯤 되어 어두운 숲을 빠져나와 마을에 닿았고,날은 완전히 샜지만 잿빛하늘에 사방은 우중충했다.
울창한 숲 사이로 난 아스팔트길을 따라 오르막이 이어졌지만,
숲의 싱그러움에 취해 힘든줄도 몰랐고,하루종일 걸어도 좋을만큼 숲의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
오늘만 지나면 남은거리는 드디어 두자릿수가 된다.
아주 까마득했던 숫자가 눈앞에 다가왔는데도 여전히 남은거리는 까마득해 보였다.
긴장감이 떨어진데다 몸도 마음도 점점 지쳐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잘해왔는데,남은 기간 행여나 탈이라도 나서 그르치면 어쩌나~하는 생각이 자꾸만 나를 압박했는데,
끝까지 무탈하게 계획대로 마치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강했다.
무성한 숲길은 한동안 이어졌고,나무들은 하나같이 다 초록색 이끼옷을 입고 있었다.
비록 수도원은 못보지만,이 루트를 선택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난 평지길보다 산길이 더 취향에 맞았다.
오랜만에 언니와 걸음을 같이 하는것도 너무 좋았다.
언니를 위해 내가 이렇게 멋진 숲길을 마련해 놓은거라고,하느님한테 전화해서 비를 내리지 않게 해달라고 특별히 부탁했다고 아무말 대잔치를 하며 뻥카를 날리기도 했다.
숲길과 목장길,그리고 작은 마을을 번갈아 걷는 구간이었다.
목장길 따라 걸을땐 물기 머금은 초록풍경이 너무 예뻤는데,소똥 말똥 냄새도 장난아니었다.
여차하면 흙과 범벅이 된 소똥을 밟을 수도 있어 항상 발끝을 신경썼다.
갈리시아 지방으로 들어서며 유독 눈에 띄는 것이 바로 돌로 된 담벼락이었다.
돌로 쌓은 방식이 여간 정교한게 아니었는데,크기가 제각각인 돌들을 모아 빈틈없이 착착 쌓아놓은 모습이 볼수록 경이로웠다.
도대체 얼만큼의 세월의 더께가 쌓였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고,앞으로도 오랫동안 이대로 보존될거 같았다.
기부제로 운영되는 무인판매대가 있지만,그냥 통과했다.
따뜻한 오뎅국물이나 국물 떡볶이라도 있으면 얼른 집어들텐데..
비상식으로 사과나 복숭아 하나씩은 꼭 배낭에 넣어두었는데,날이 쌀쌀하니 과일도 잘 먹히지 않았다.
잿빛하늘에 우중충한 날이지만,비가 안오는것만도 다행이었다.
그림같이 펼쳐진 초원을 내려다보며 감사하며 걸었다.
길은 질퍽해도 목장길따라 걷는 길이 참 좋았다.
크게 오르내림없이 평탄하게 길이 이어졌고,코끝으로는 계속하여 소똥냄새가 머물렀는데,
어릴적 익숙했던 추억의 냄새라 정겹기도 했다.
마을이 보이면 언제나 반가운 마음에 걸음이 빨라졌다.
근데,오늘 지나는 마을들은 아주 작아서 열가구 이상 되는 마을이 거의 없었다.
이렇다할 bar나 레스토랑도 없어 쉬어갈곳도 마땅찮았다.
자그마하게 일구는 텃밭이며 집주변으로 서있는 과실수등이 우리의 시골풍경과 너무 흡사했다.
`뿌에도 또마르 우나 포또? (사진 한장 찍어도 될까요?)`
소가 우유먹다말고 놀랄까봐 먼저 양해를 구했다.
카메라를 들이대니 소는 센스있게도 카메라를 응시했다.
마을마다 밤이며 사과들이 바닥으로 나뒹굴고 있었다.
따로 수확을 하려고 심어 놓은게 아니라 그냥 관상용인듯한 사과나무들이 많았는데,
하도 먹음직스러워 몇개 따서 먹었더니 어떤건 시큼하여 한입 베어먹고 버렸고,
또 어떤건 먹을만하여 한개를 다 먹기도 했다.
죄사함을 받으러 온 길에서 다시 또 죄를 짓게 되는 이 우매함이라니..
먹는데 눈이 멀어 포도,복숭아에 이어 사과서리까지 했다.
햇살이 나오며 그림자와 함께 걷다가 다시 혼자가 되었다.
저만치서 혼자 걷고 있는 언니의 발걸음은 아주 가벼워 보였고,걸음도 시종일관 일정했다.
진작부터 저렇게 걷고 있는 언니의 뒷모습을 봤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목적지를 5킬로 남겨놓고 몸을 좀 녹이려 bar에 들어갔더니,완전 꼬레아 반상회가 열리고 있었다.
화가아저씨네 팀도 있고,어제 약국에서 만났던 아가씨들,그리고 우리보다 앞서 걸었던 용수도 있다.
뒤이어 merc도 들어왔다.
하도 작은 농가마을만 지나오다보니 어디 쉴만한 bar가 없긴 했다.
바삭바삭하게 구워나온 또스따다에 커피로 요기했는데,커피가 유리잔에 나와 장갑을 끼고 마셨다.
이곳 빵은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게 참 신기했다.누구는 하도 바게뜨를 먹어서 입천장이 다 까졌다 그러던데,나는 멀쩡했다.
하튼가..먹성하나는 알아줬다.
빗방울이 흩날리기 시작하며 조금씩 이슬비가 내렸다.
제발 사리아에 도착할때까지 큰 비가 내리지 않기를 기도했는데,다행히 하느님이 도우셨다.
사리아에 도착하니,해가 반짝 났다.
벽에 그려진 순례자 모습이 바로 내 모습과 같았다.
시가지를 관통해 한참을 걷다가 왼쪽으로 꺾어 긴 계단을 올랐다.
계단을 올라서니 예약한 알베르게 간판이 바로 보였다.
마요르 알베르게(10유로)를 미리 예약해두길 참 잘했다.
다른 순례자들은 여럿이 쓰는 방을 배정했는데,우리는 딱 네명만 쓸 수 있는 방을 따로 주었다.
샤워부스는 딱 두개뿐이었다.
갈아입을 옷을 둘데가 마땅찮아 세면대 위에 벗어놓고 들어가 씻고난 후에는 화장실문을 아예 잠그고 얼른 입어야만했는데,
다른 외국인들은 서슴없이 옷을 벗고 속옷 하나만 걸치고 아무렇지도 않게 샤워실을 왔다갔다 했다.
대부분의 알베르게에 있는 샤워실 크기도 딱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크기였는데,
그 좁은 공간에서 물기가 채 마르지도 않은 몸에 낑낑거리며 옷을 입고 나면 얼굴이 땀범벅이 될때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옷을 제대로 갖춰입고 나오는 순례자들은 우리 동양인들 뿐이었다.
주인여자는 데스크에 잘 붙어있지를 않았다.
문밖에 나가 전화를 하거나,알베르게 옆에 있는 bar에 앉아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하도 추워서 히터를 좀 틀어달라 이야기할때도 한참 기다려야만했다.
영훈이가 사 온 빵을 먹으러 주방에 갔더니,화가아저씨가 그림을 그리고 계셨다.
오늘의 작품은 사리아 성의 유적이었다.
좋은 재주를 가지셔서 너무 부러웠다.
나도 좀 예술적인 재주를 타고 났으면 좋았을텐데..
숙소에서 한 10여분 떨어진 곳에 아주 큰 슈퍼가 있어 시장을 좀 봤다.
따뜻하게 먹을 수 있는 수프와 달걀,그리고 빵과 과일을 사서 저녁상을 차렸다.
비내리는 거리로 나와 골목길 투어에 나섰다.
현대식 건물이 많은 신시가지는 크게 매력이 없었고,숙소가 있는 구시가지 주변으로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많았다.
특히 막달레나 성당 주변으로 나있는 골목길이 참 예뻤다.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100km이상을 걸어야 순례자 완주 증서를 주는데,사리아가 최소한의 거리 요건이 되는 출발점이다.
그래서 중세부터 지금까지 순례의 중심도시라 한다.
듣기로는 사리아 이 후부터는 순례객이 부쩍 늘어 알베르게 예약도 쉽지 않을꺼라하여 긴장을 했는데,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더 순례객이 줄어든거 같았다.
한국음식을 판다는 간판에 혹해 들어가봤더니,다 매진이란다.
신라면은 정말 민간외교관이란 별칭이 붙을만하다.
한국은 몰라도 신라면은 알 정도로 유명하다는 신라면은 순례길위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리아 성은 들어갈 수 없어 주변 공원만 한바퀴 돌았다.
날이 꽤 차가웠는데도 추위도 잊고 비내리는 거리를 쏘다녔다.
골목은 좁지만 아주 정갈했고, 거리위의 사람들을 보는것도 너무 흥미로웠다.
그러다 쎄요가 있다는 말에 혹해 어느 박물관에 들어가기도 했는데,분위기가 영 희한했다.
사이비 종교 분위기가 물씬 났고,전시해놓은 그림도 조금 무시무시하여 혹시라도 감금되지는 않을까 싶어 얼른 나왔다.
성당에 들어가니 미사가 진행중이었다.
조금 앉았다가 하도 추워서 나왔다가 나중에 다시가서 쎄요만 받았다.
저녁도 먹었겠다,가볍게 차나 한잔 마시러 bar에 들어갔는데,저녁시간인걸 그만 깜빡했다.
대체적으로 순례길의 bar나 레스토랑은 낮엔 음료만 파는곳이 많았고,저녁에는 음식을 먹는게 일상화되어 있었다.
언젠가처럼 또 식탁보를 쫙 깔아줄까봐 먼저 선수쳐서 차만 한잔 마실꺼라 말하고 자리에 앉아 따끈한 차를 시켰는데,
왠지 뭐라도 먹어야할거같은 압박감이 몰려왔다.
`뿔뽀,뽀르파보르~(문어요리 주세요~)`
결국 `문어와 홍차`라는 아주 희한한 조합으로 두번째 저녁을 먹고야 말았다.
갈리시아 지방으로 들어선 이 후부터는 하루라도 비소식이 없는날이 없었다.
내일도 어김없이 비그림이 그려져 있다.
막 잠들라 하는데,숙소주인이 들어와 `부엔 까미노!`하며 일일이 작별인사를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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