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일 : 비야프랑까 델 비에르소~오 세브레이로(28.4km),6시간 30분
2019년 10월 13일
8시부터 비가 예보되어 있었다.
비오기전에 조금이라도 더 걸어놓을 요량으로 6시 조금 넘어 숙소를 나왔다.
매일같이 보던 별들의 잔치도,해뜨기 전의 차가운 하늘도 오늘은 볼 수 없었다.
심란한 마음으로 시내를 빠져나가 다리를 건너 오른쪽 언덕으로 향했다.
잔뜩 흐린 새벽하늘에선 가끔씩 천둥까지 쳐대고 번개도 번쩍거렸다.
우렁찬 계곡물소리를 들으며 도로 한켠으로 난 까미노를 따라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주변으로 온통 산으로 뒤덮인 도로를 따라 앞사람 불빛을 따라 걷는데,점점 천둥소리가 요란해졌다.
가끔 짐승 울음소리까지 들려 저절로 걸음이 빨라졌는데,땅바닥에는 밤송이며 알밤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듯 우르릉 쾅쾅 하는 소리에 놀라 배낭을 내려놓고 비 단도리를 하고나니,어둠위엔 오로지 나뿐이다.
어두운 산길을 걸을땐 어물쩍거리다가는 큰일난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불빛을 보고가야 안심인데,불빛을 놓치면 첩첩산중에 혼자라 조금 무섭다.
bar에 들러 요기를 할때만해도 소강상태였던 비는 마을에 닿자마자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이 후,비는 하루종일 끊임없이 내렸다.
소리없이 하염없이 내렸는데,한시도 멈추지 않았다.
해발 500m에서 1,300m까지 고도를 올려야 하는 고난이도의 구간이었다.
칸타브리아 산맥을 넘으며 갈리시아 지방으로 진입하는 코스였는데, 예상대로 순례길 전 구간 중,가장 힘들었다.
날씨가 좋아도 션찮을판에 거기에 비까지 내리니 정말이지 죽을맛이었는데,계속하여 내리는 비에 우의도 별 소용없이 흠뻑 젖어 심지어 꼭꼭 짜면서 걸어야만 했다.
바람이 안부는게 정말 다행이라 여겼다.
그 와중에도 산 위의 마을은 마치 알프스 마을인듯 그림같이 예뻤다.
초원위로 말들이 노닐고 산골짜기마다 구름이 내려앉아 한폭의 그림이 따로 없었다.
우중충한 산길은 아주 좁고 가파르며 흙이 파여 물길이 나기도 했고,
돌길은 무척 미끄럽고 거칠었다.
소와 말의 배설물은 걷는내내 함께 했다.
경사가 아주 급하고 오르막도 아주 길었는데,비가 오다보니 어디 쉴만한곳도 마땅찮아 주구장창 걷는것 말고는 별 도리가 없었다.
언덕을 올려다보면 아주 쉽게 당도할것처럼 보여도 절대 그렇지 않았다.
꾸불꾸불하게 난 길을 오르다보면 숨이 목까지 차올랐고,걸음은 천근만근 무거워
마을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식수대를 찾아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끝없이 이어지는 산길을 돌고 도는 구간에서는 땀이 비와 뒤섞여 온몸이 흠뻑 젖었는데,
한시라도 빨리 빗속을 벗어나고 싶은 생각에 한시도 쉬지않고 숨가쁘게 걸음을 옮기고 또 옮겼다.
그렇게 28킬로를 걸어 1,330m 산꼭대기에 닿았고,바로 오세브레이로에 도착할 수 있었다.
6시간 반동안 정말이지 쎄빠지게 걸어왔다.
마을 끝으로 공립알베르게가 있었다.(일인당 8유로)
길게 줄이 이어져 있었는데,일부는 건물안으로 들어섰고 일부는 건물 밖에서 비를 맞으며 우의를 쓴채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근데,접수하는 사람이 얼마나 느려터진지 한사람당 거의 10여분은 걸리는거 같았다.
걸을땐 몰랐는데 가만히 서서 비를 맞고 있자니 온몸이 오돌오돌 떨려 참을 수가 없었다.
40여분을 기다린끝에야 체크인을 하고 지정된 방으로 들어갔더니만,이건 뭐 완전 역대급의 알베르게였다.
A,B로 나누어 두개의 공간이 있었는데,한 방에 최소 50개 이상의 침대가 다닥다닥 붙어 있어 영락없는 수용소 분위기였다.
비에 젖은 옷가지들과 배낭들,그리고 각나라 사람들이 뒤섞여 아주 오묘한 냄새까지 나서 하룻밤 어떻게 묵을지 심히 걱정이 되었다.
샤워실은 더 재밌었다.
문이 없고 칸막이로만 되어있어 훌렁 벗고 씻고나와 옷을 갈아입을 수 있는 구조였다.
외국인 순례자가 들어오며 `오우,나이스~`했고,
나또한 그래도 따뜻한 물이 나온다며 `나이스!`를 외쳤다.
남자 샤워실은 차가운 물이 나온다고 했는데,더운물이 나오는것만해도 천만다행으로 여겼다.
이렇게 날궂은 날,이 작은 마을에서 단돈 만원에 몸을 씻고 누울 공간이 있으니 이걸로 됐다.
빨래는 2유로를 주고 건조기를 돌렸다.
쉐어하자는 부탁에 뭣도 모르고 오케이했는데,나중에 알고보니 다섯명분의 빨랫감이 있었고,
빨래는 당연히 마르지도 않은채 나왔다.
점심이 늦어져 레스토랑에서 이른 저녁을 먹었다.
전채요리가 잘못 나온줄도 모르고 배가고파 허겁지겁 몇숟가락 먹었는데,먹다보니 아니었다.
음식이 나오자마자 물르면 되는것을 언제나 한템포 느리게 알아채는게 문제였다.
생장에서는 심지어 다먹고 나서야 알아챘다.
주요리는 언제나처럼 만만한 뽀요를 주문했는데,닭다리 하나로도 충분히 요기가 되었고 오늘은 특히나 부드러웠다.
몸을 좀 따뜻하게 하려고 와인을 주문해 몇잔 마셨는데,감기가 오려는지 몸이 으슬으슬 추웠다.
바로 옆 테이블에선 세찬이가 식사중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는 불 위에 용기를 올려놓고 뭔가를 따뜻하게 마시고 있었다.
누나,누나~부르며 아주 정답게 인사한다.
볼수록 참 괜찮은 청년이었다.
오세브레이로는 성체성혈의 기적이 일어난 성당이 있었는데,까미노 위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성당이었다.
날이 궂은 어느날,사제는 단 한명의 거지꼴을 한 순례자를 위해 귀찮은 마음이 들었지만,미사를 집전하셨는데,
빵과 포도주를 드시며 주님의 살과 피로 변하리라 기도했다.함께 있던 순례자도 간절히 기도를 했고,진짜로 살과 피로 변해있었다한다.
그 후,이사벨 여왕이 안전한 곳으로 이동한다는 명목하에 성체성혈을 옮기려 했으나,말이 꼼짝도 하지않아 어쩔 수 없이 다시 성당으로 들어가 지금까지 보관하게 되었다고 한다.
비도 피할겸 기적의 성당안에서 구석구석 살펴보며 오랫동안 머물렀다.
비는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일몰로 유명한 곳이었지만,일몰은 커녕 한치앞도 안 보였다.
작은 오두막처럼 생긴곳이 상점이었다.
빗속을 걷고 있는 아가씨한테 어딨냐 물었더니,본인이 운영하는 상점으로 안내했다.
작은 공간에는 없는게 없었다.빵이며 각종 간식꺼리와 음료등 별의별게 다 있었는데,
엠빠나다를 맛볼 수 있도록 잘게 잘라 접시에 담아놓았다.
다행히 내 침대 옆으로는 히터가 있어 춥지는 않았다.
움직일때마다 침대가 삐걱거려 아랫층 남자한테 폐가 될까 무척 조심스러웠는데,
아랫층남자는 내가 계단을 오르 내릴때마다 휴대폰으로 불을 비춰 발을 헛디디지 않게 신경써 주었다.
그런가하면 아스또로가에서 봤던 그 케세라 아가씨는 술을 마시고 들어와 마치 제집인양 떠들며 단잠을 깨웠고,
영훈이 아랫층 남자는 시끄럽다고 매트리스를 통째로 들고 나갔다.
다양한 나라의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 순례길위엔 별의 별 사람이 다 있었다.
이제 산티아고까지 183km..딱 일주일 남았다.
내가 정말 다 걸을 수 있을까?
초반의 호기는 다 어디로 가고 ,점점 마음이 약해져 하루빨리 산티아고 대성당앞에 서는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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