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일 : 빨라스 데 레이~아르수아(28.8km),7시간
2019년 10월 18일
6시 30분 출발..
오늘도 빗속에서 하루를 시작했다.
온기 하나 없는 주방에 앉아 차가운 빵덩어리를 꾸역꾸역 입에 넣고 숙소를 나와 차가운 새벽 공기속으로 터벅터벅 들어가는것도 이제 머지 않았다.
한동안 새벽길은 늘 설렘과 기대로 가득했었다.
쏟아지는 별들과 황홀한 여명,그리고 상쾌한 공기와 기분좋은 바람이 함께하곤 했는데,이젠 소리없이 내리는 이슬비와 차갑고 싸늘한 공기뿐이었다.
그 많던 순례객들은 다 어디를 갔는지 까미노가 한적했다.
비닐을 치마처럼 두른 순례자와 언니와 나,이렇게 셋이 어두운 숲길을 걸었다.
여전히 숲이 울창하여 조금 긴장되기도 했고,랜턴빛까지 흐릿하여 더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까미노 화살표를 이쪽저쪽 잘 살펴가며 긴장속에서 걸음을 이어갔다.
8킬로쯤 걸어 몸좀 녹일겸 bar에 들어가 커피와 또스따다를 주문했다.
빗속에 정신없이 걷다보니 어디까지 왔는지 잘 가늠이 안되어 종업원한테 물었더니,깜빠니야란 마을이었다.
bar가 자그만해서 먹는곳은 바로 옆 천막으로 지어진 곳이었는데,공간은 넓었지만 온기가 거의 없다보니 비에 젖은 몸이 으슬으슬했다.
뒤이어 도착한 화가아저씨는 따끈따끈한 갈리시안 수프를 들고 오셨는데,그제야 커피를 주문한걸 후회했다.
나두 수프를 시킬껄~~!
먹는 공간 뿐 아니라 화장실도 건물 뒷편으로 떨어져 있었는데,아무리 두리번거려도 여자화장실이 안보여 급한김에 남자화장실을 썼다.
날은 새고,비는 잠시 멎었다.
걸음을 옮길때마다 바닥에서 흙탕이 튀었다.
물기 머금은 돌담길은 더 투박하여 골목의 정취를 더해주고 잇었다.
오늘따라 더 거뭇거뭇한 담벼락이 오랜세월을 말해주는듯 했다.
숲과 강과 마을이 있는 풍경은 요며칠 계속되었다.
초록초록한 풍경도 매일같이 보다보니 단조롭고 조금 지루해졌다.
이렇게 사람맘이 간사했다.
끝도 없는 들판을 걸을땐 초록숲이 그리웠지만,막상 또 초록숲이 계속되니 끝없는 들판이 그리웠고,
그토록 꿈꾸고 바랐던 길위에 있지만,얼른 이 길을 벗어나고 싶기도 했다.
정말 울창한 숲이 나타났다.
얼마나 울창하고 신비로운지 세상과 아주 동떨어진 다른 세계같았다.
가끔 새소리도 들려왔고,부엉이 소리도 들려왔다.
나무마다 새파란 이끼를 두르고 있었는데,그 이끼위로 또다른 생명이 길게 뻗어 덩굴을 이루고 있었다.
이런 길은 얼마든지 걸어도 좋았다.
오늘도 바닥으로 밤들이 지천으로 떨어져 있었다.
내것도 아니고,주워갈 수도 없어 탐내면 안되는데도 자꾸만 두고 가기 아까운 마음이 들었다.
한알 주워 퉤퉤거리며 벗겨 오도독 오도독 씹는걸로 만족했다.
찻길로 나와 하늘이 열리면서,바로앞에 커다란 마을이 들어왔다.
바로 문어요리로 유명한 멜리데란 마을이었다.
아주 오래된듯한 다리를 건너 멜리데 외곽의 주택가로 진입했다.
신식건물이 있는가하면 오래된 돌집도 많았다.
돌틈으로 난 풀들이 얼마나 습한 지역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성당에 들어가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앞으로 남은 길을 축복해주소서~~
그리고 감사의 기도를 했다.
지금까지 걸어오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종교는 없지만,성당에 들어서면 나도 모르게 숙연해져서 감사의 기도가 저절로 나왔다.
100km표지석을 지나온 이 후로 표지석이 나올때마다 남은 거리를 확인했다.
이전까지는 숫자가 실감나지 않았는데,한걸음 한걸음 걸을때마다 조금씩 줄어드는 숫자를 보면 한걸음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다시금 깨달았다.
여전히 아쉬운 마음보다는 후딱 지나갔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멜리데는 아주 큰 도시였다.
사람도 차도 아주 많고,높고 세련된 건물들도 즐비했다.
뿔뽀(문어요리)로 유명한 도시답게 가게마다 문어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호객행위까지 아주 자연스럽게 하고 있었다.
`너네 어디서 왔니?
한국에서 왔는데..
맛있어요~~`
한국말을 곧잘 했다.
미안..사진만 찍고 갈테니까 포즈좀 부탁해~~
세상엔 공짜는 없다.
쎄요를 찍으면 단돈 얼마라도 기부를 하고 나와야만 했다.
바로 앞에서 지켜보고 있어 그 누구라도 그냥 나오기는 힘든 구조(?)였다.
큰 돈도 아니니 언제나 좋은 마음으로 도네띠보했다.
하지만 허름한 복장으로 성당 문앞에서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무시했다.
신시가지를 지나 구시가지로 들어서니 건물들은 고풍스러워졌다.
까미노 사인을 무시하고 무작정 성당 건물만 바라보고 걸었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짐작해보면 언제나 성당주변이 중심지였다.
과연 시청과 성당을 중심으로 그 주변으로는 각종 기념품점과 음식점,그리고 상점들이 많았다.
정신없이 구경하다 또 까미노 시그널을 놓쳤다.
어물어물거리고 있으니,지나가던 할아버지가 방향을 잡아주신다.
마을을 벗어나 언덕을 올라서니,공동묘지로 보이는 새하얀 건물이 보였다.
공원으로 들어가보니,방금 지나온 멜리데가 한눈에 들어왔다.
주황색 지붕을 한 건물들이 초록의 들판과 어우러져 그림같이 아름다웠다.
다시 숲길이 나타났다.
마을을 지나면 언제나 반복되는 풍경이었다.
갈리시아 지방으로 들어서며 참 독특한 형태의 구조물이 자주 눈에 띄었다.
바닥으로부터 어느만큼 공간을 띄워 세워졌는데,크기도 아주 아담했다.
집집마다 규모와 장식도 제각각이었다.
어느 집은 기와집처럼 아주 그럴듯했고,또 어느 집은 나무로 지어져 아주 소박했다.
처음엔 종교와 관련된 공간인줄 알았다.매일매일 기도하며 참회할 수 있도록 만든 그런 곳이 아닐까 생각했는데,알고보니 오레오(horreo)라 불리는 갈리시아 지방 특유의 곡식창고였다.
거의 일년내내 비가 내리기 때문에 수확한 농작물을 오랫동안 보관하기 위한 그들만의 지혜였다.
지면으로부터 공간을 두어 쥐나 다른 짐승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만들었고,통풍의 역할도 했을것이다.
마을끝으로는 빨래터로 보이는 곳도 있었다.
그나저나 이곳사람들은 건조기가 필수겠다.
햇볕 있는 날이 적고 습기가 많아 빨래를 말리려면 힘들겠다.
당장 하루하루 내 빨래 말리는것도 일이었다.
매일같이 건조기를 쓰느라 기본 4유로씩은 들었는데,돈은 둘째치고 시간이 문제였다.
누군가 건조기를 쓰고 있으면 내 차례를 기다려야했고,건조기가 돌아가는 동안에도 끝나는 시간을 잘 체크해야만 했다.
햇볕에 빠짝 말릴때가 좋았다.
이래서 사람은 없어봐야 그 가치를 안다고 하나보다.
두 갈래로 길이 나뉠땐 무조건 짧은 길로..
또다시 우거진 숲길이 나타났다.
처음보다는 감동이 덜했다.
같은 풍경도 자꾸보면 감동이 덜해지기 마련이었다.
한동안 깊고 으슥한 숲이 이어졌는데,언니랑 둘이 전세내어 걸었다.
앞뒤로 순례자가 아무도 없었다.
혼자였다면 으스스한 마음이 들어 걸음이 빨라져 이 아름다운 숲이 눈에 안들어 왔을것이다.
그야말로 때묻지 않은 청정 자연숲이었다.
지쳐있던 몸으로 좋은 에너지가 마구마구 흡수되는 기분이 들었다.
드디어 40km대로 진입했다.
.
화장실이 급해 bar에 들어갔더니 세찬이가 앉아있었다.
누나,누나~하며 여전히 다정하게 인사한다.
순례길의 bar는 어딜가든 정갈하고 깨끗했다.
밖에서보면 아주 허름해보여도 막상 들어가보면 세련미가 넘쳤다.
화장실도 아주 깨끗하여 냄새하나 없었다.
아무래도 순례길 전체가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보니 잘 관리하는것 같아 보였다.
이 후,또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으레 비가 내리겠거니~하고 생각했지만,여간 성가신게 아니었다.
배낭을 내려 커버를 벗기고 카메라를 쑤셔넣고나서 눅눅한 우의를 꺼내입었다.
소리도 없이 참 얌전하게도 내리는데도 양이 꽤 많았다.
언덕에서 내려다 보였던 마을이 목적지인줄 알았는데,마을 하나를 더 지나야 했다.
나올듯 말듯하는 마을과의 밀당시간은 그동안 늘상 있었던 일이라 덤덤하게 마을로 들어섰다.
다리 아래로 흐르는 물이 얼마나 깨끗한지 그대로 마셔도 아무 문제 없을것처럼 보였다.
이토록 깨끗한 자연과 문화를 가진 이곳 사람들이 부러웠다.
이런 환경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했을것이다.
JULY란 낙서는 계속하여 있다.
7월에 걸었다는 뜻인가,아님 여친 이름을 써놓았나?
한글 낙서가 없어 다행이었다.
많은 낙서중에 한글 낙서가 있으면 괜히 내가 다 무안했다.
시 한귀절이나 격려하고 응원하는 낙서는 봐줄만했는데,개인적인 메세지는 전혀 공감이 안되었다.
오레오는 기능과 형태는 비슷해도 규모나 장식은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척봐도 잘사는 집과 그렇지 않은 집이 구분되었다.
순례길에서 동물을 만나면 어떻게 행동해야하는지 행동요령을 안내해주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내가 만났던 개나 고양이,닭들은 죄다 순했다.
마침내 아르수아에 도착했다.
7시간만이었다.
오늘 숙소는 까미노에서 조금 떨어져있다하여 슈퍼를 먼저 들렀다.
왼쪽으로 가라고 친절하게 입간판도 세워놓았다.
입구에서 벨을 눌렀는데도 한동안 인기척이 없어 문밖에서 한참을 기다리는데,뒤이어 merc가 왔다.
merc친구가 전화를 걸더니 금방 주인이 올꺼라며 기다리란다.
나는 침대 다섯개가 놓여진 방을 배정받았다.
1,2층으로 샤워실이 하나씩 있었는데,인원수에 비해 너무 적어 재빨리 몸만 씻고 나와 빨래터를 이용했다.
화장실과 붙어있어 누군가 샤워하는동안은 화장실을 쓸 수 없어 불편했다.
테라스가 아무리 이뻐도 앉아 있을 일은 없었다.
날이 하도 춥다보니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다행히도 오늘 알베르게는 미리 히터를 틀어 놓았는지 방안으로 온기가 가득했다.
주인 여자가 얼마나 싹싹하고 상냥한지 방마다 돌아다니며 몸을 녹이라며 과자랑 초코라떼까지 주었다.
이래저래 감동하여 지갑에 있던 천원한장을 기념으로 주었다.
삶은 계란과 수프로 늦은 점심을 해결했다.
저녁은 빠에야였다.
먹을수록 짰지만,한그릇을 다 먹어치웠다.
나의 길,산티아고도 이제 이틀이면 끝이었다.
침대에 누워 그동안의 시간들을 돌이켜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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