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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산티아고 순례길

제7일 : 또레스 델 리오~로그로뇨(20km)


제 7일 : 또레스 델 리오~로그로뇨(20km),7시간


2019년 9월 25일


아침마다 물집잡힌 발을 등산화에 끼워넣느라 죽을맛이었다.

신기한건 걷다보면 조금씩 통증이 덜해지고 익숙해진다는거였다.

걸은지 일주일쯤 되니,몸도 마음도 점점 순례길에 맞춰져 가고 있었다.

여느때와 똑같이 요플레하나,쥬스한팩,그리고 빵 두쪽이 아침이었다.

중간에 bar를 만나 요기를 하면 되었지만,간혹 문이 닫혔거나 어떤 구간은 10킬로도 더 걸어야하는 마을에 위치해 있을때도 있었다.

bar를 만나더라도 순례자들이 많으면 순서를 기다려야 했는데,그곳 사람들은 언제나 느긋했다.바쁠것이 없었다.

손님이 바로 앞에 있어도 오랫동안 사적인 전화를 하기도 했고,자기들끼리 낄낄거리며 사담을 다 나눈 후에야 손님을 응대했다.

어쩌다 재촉하는 몸짓을 보이면 마치 큰 실례를 한듯 인상을 찌푸리기도하여 나도 그들과 똑같이 느긋해지는 수 밖에 없었다.


7시 30분에 출발했다.

알베르게를 나서니 부산아저씨들도 막 출발하여 오는 중이었다.

처남 매부가 오손도손 걷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외국인 순례자들 중에는 부부도 있었고,형제지간도 있었고,오누이지간도 있었는데,참 정스러워 보였다.



자그마한 성당을 지나 까미노 길위에 서니,여명빛이 기똥찼다.

환상적인 매직아워는 갈리시아 지방을 가기 전까지는 거의 매일같이 아침저녁으로 경험했는데,

까미노가 주는 아주 큰 매력적인 선물이었다.

덕분에 새벽길의 발걸음이 경쾌했고,덕분에 하루의 고단함도 잊을 수 있었다.




그 어느 날보다도 황홀한 아침이었다.

흙길로 된 길을 오르다보니 경작지와 구릉지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고 올리브밭이 끝도 없었는데,마침 그 너머로 아침해가 뜨겁게 떠오르고 있었다.

어찌된 일인지 뭉클해지며 가슴이 벅찼다.

불현듯 상념에 잠기기도 했는데,야고보의 무덤이 있는 산티아고 대성당까지 잘 걸어낼 수 있을까?하는 막연한 두려움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십자가 하나씩을 짊어지고 산다.

하지만 감당할 만큼만큼의 십자가라 생각한다.

앞으로 남은 길,무탈하게 마칠 수 있기를 기도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길 위에 있다는 사실에 대해 감사해 했다. 




 

누군가의 소원을 담은 돌탑이 세워져 있었다.

지나가는 순례자들이 돌하나씩을 올리며 기도했다.

견고한 돌탑은 아주 여러개였다.





너른 들판과 포도밭이 끝이 없었다.

매일같이 늘 같은 길을 걷는 기분이었다.

포도밭,밀밭,그리고 옥수수밭이 가도가도 끝이 없을 정도로 지평선을 이루고 있었다.

가끔 도로를 지날땐 쌩쌩 달리는 차들을 신경써야만 했다.

차량통행은 많지 않았지만,어느 구간에서는 눈깜짝할 사이 쌔앵~하고 달리기도 했다.

바로 앞으로는 전 날 저녁을 함께 먹었던 프랑스 순례자가 걷고 있었다.

구렛나루 수염이 참 인상적이었는데,몸이 무척 다부져 보였다.

프랑스 어디서부터 걸어 지금까지 한달넘게 걷는 중이었다.

나보고 몇일째 걷고 있느냐 물어서 일주일째라 그러니,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푸드트럭을 만나 커피 한잔을 주문하고 쎄요를 받았다.

순례자 수첩은 까미노길 위에서 순례자임을 증명하는 신분증이었는데,체크인을 할때는 필수로 필요했다.

빈칸에 도장이 채워진다는건 그곳을 통과했다는 증거였고,그만큼 걸었다는 증거였다.

중간중간 bar에 들르거나 성당을 들를땐 항상 쎄요가 있는지를 먼저 물었다. 

그 곳만의 특이한 문양을 새겨 넣었는데,날짜까지 꼼꼼히 써주었다.

아주 인상적인 쎄요를 받을때면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한쪽 무릎이 안좋은지 여언이 무릎보호대를 하고 있었다.

괜찮냐 물으니,노프러블럼이란다.

항상 챙이 있는 멋쟁이 모자를 썼다.수염은 항상 코밑으로만 무성했다.

우리만의 세레모니를 하면 함깨 따라하며 같이 웃었다.

점점 아는 얼굴들이 많아졌다.

같은 방향으로 비슷한 거리만큼 걷고 같은 마을에서 묵으니 당연했다.






멀리서 보였던 마을이 비아나였다.

초입에 도착했다고 언제나 방심하면 안되었다.

마을 중심지까지는 긴 오르막을 헐떡대며 올라야만 했다.

한껏 달아오른 아스팔트길을 걸을땐 언제나 발바닥에 불이 났다.

누군가 순례길에서 가장 중요한 용품이 뭐냐 묻는다면 신발과 양말이라 대답할것이다.

튼튼하고 방수 잘되는 신발과 폭신한 양말..

발가락 양말도 하나 가져갔었는데,신지 않고 놔뒀다가 물집으로 고생하는 영훈이를 주었다.

다행히 물집이 가라앉고 굳은살이 박혀 신을 기회가 없었다.








비아나 산타 마리아 성당은 성야고보 상이 있는  내부장식으로 유명했다.

외부장식 또한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마침 bar에 부산분들이 계셔서 배낭을 맡겨놓고 성당안으로 들어갔다.





쎄요를 받고 기부함에 1유로씩을 넣었다.

굳게 닫혀있는 공간이 있어 들어가보고 싶다하니,1유로를 넣으면 자동으로 문이 열리는 구조로 되어있었다.

어수룩하게 서있으니,성당지기님이 직접 문을 열고 안내해주셨는데,

한참동안이나 스페인어로 그림설명을 하셨다.

하도 열정적이라 중간에 끊지도 못하고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고개를 끄덕거리며 아는척을 했다.







성당을 나오니 여언이 벨기에,캐나나 아저씨랑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신발까지 갈아신고는 아주 여유만만이었다.

도시가 너무 예뻐 비아나를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9킬로 정도 떨어진 로그로뇨까지 가야만 했다.

어느새 노란색 화살표를 찾고 있었고,어느새 또 전투자세로 걷기모드로 돌입했다.







도시를 벗어날땐 언제나 아쉬움이 가득했다.

기억으로는 한계가 있으니 더 많이 카메라속에 집어넣으려고 애를 썼다. 

걸으면서 기록한다는건 정말이지 보통일이 아니었다.

머뭇거리며 몇장 찍고나면 앞서가던 사람은 꽁무니조차 안보였다.

숨을 참고 찍다보면 숨이 거칠어져 몸이 두배로 더 힘들었다.

비오는 날은 꺼냈다 넣었다 하는 수고로움을 감수해야만 했고,

알베르게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충전할 수 있는 곳을 찾았고,

어딘가 머무를땐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항상 신경써야만 했다.

욕심만 버리면 안해도 될 수고였지만,그 욕심으로 소중한 추억을 고스란히 집까지 가져올 수 있었다.

 








비아나를 벗어나니,긴 내리막이 나오고 흙길이 나왔다.

긴 담벼락을 끼고 걷다 뜨거운 아스팔트길를 따라 걸었다.







태양은 이루말할 수 없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그늘이 없어 길바닥에 앉았는데,엉덩이가 뜨거울 정도였다.

모자를 쓰고 햇볕가리개를 해도 머리가 뜨거웠다.

배낭을 멨어도 등짝이 뜨끈뜨끈 했다.

 로그로뇨까지 가는길이 업다운이 심하지 않은건 참으로 다행이었다.






언제나 갖고 있는것에 대한 소중함을 모르고 산다.

뜨거운 햇볕 덕분에 빨래가 금방 마르고,침낭이 뽀송뽀송하다는걸 그 때만 해도 당연한걸로 생각했다.

작렬하는 태양을 언제쯤 벗어날 수 있을까? 하며 힘들어 했는데,

그 햇볕의 소중함은 갈리시아 지방으로 들어서며 아주 절실히 느꼈다. 

  


캐나다와 벨기에에서 온 순례자를 자주 마주쳤다.

트래킹을 좋아해 캐나다 로키산맥의 산자락을 자주 간다 그랬다.

공통점을 찾기위해 나두 로키산맥 가봤는데 좋더라~벤쿠버는 참 깨끗한 도시더라~하며 떠벌렸다.

벨기에 순례자는 거의 말이 없었다.

목소리를 거의 들어 본 적이 없었는데,웃음은 아주 많았다.서글서글한 웃음에서는 진지함이 배어났다.




이곳이 사랑의 맹세를 하는 곳인지,꽤 여러그루의 나무에 하트를 그려 이름을 새겨넣었다.

  





로그로뇨가 가까웠다.

멀리서봐도 규모가 꽤 큰 도시였다.

마침 와인 축제중이라 하니,도시가 시야에 들어오자 걸음이 빨라졌다.

까미노길임을 알려주는 조가비 모양이 참 맘에 들었다.



일조량이 이토록 풍부하니 포도로 유명할 수 밖에 없었다.

포도 뿐 아니었다.

복숭아며 사과까지 당도가 끝내줬다.

한번은 길가에 있는 복숭아를 하나 따먹어봤는데,정말 달콤했다.

도대체 과일서리를 몇번이나 했던건지 참..


예약해 두었던 알바스 알베르게 간판을 보자 반가웠다.

이제 거의 다 왔구나~하는 안도감이 들었다.




도시로 들어가는 초입엔 꽃으로 장식한 아주 화려한 건물이 하나 있었는데,

무슨 건물인지 그냥 `작은 오두막`이라고만 씌여있었다.

그 앞으로는 나이가 지긋한 아주머니가 각종 기념품을 팔고 있었는데,

인사만 하고 그냥 지나쳤다.






로그로뇨는 잘 단장된 공원을 지나야 했다.

허허벌판만 걷다가 시원한 그늘 속으로 들어가니 살만했다.

공원안에는 발을 담글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었는데,지나가던 마을 주민이 발을 담그라는 시늉을 했다.

 



마침내 로그로뇨에 입성했다.

그리고 또 우리 앞엔 알베르게를 찾아가는 큰 숙제가 놓여있었다.

일단은 다리를 건너 무슨 공원을 찾았다.




언제나 알베르게 찾는건 쉽지 않았다.

휴대폰에 머리를 박고 왔다리 갔다리 하고 있으니,지나가던 중년남녀가 가던 길을 멈추었다.

그러더니 이내 운동중이던 어르신도 다가왔고,

바로 숙소앞 대문까지 안내해 주었다.

`감사합니다.정말 친절하시군요.

이곳 정말 예쁘네요,특히 햇살이 정말 좋아요~`

미안해서 괜히 아는 단어를 총동원하여스페인어로 몇마디 하는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감사인사였다.

우린 누가봐도 동정심의 대상이었나보다.내가봐도 도와주고 싶은 비쥬얼에 옷차림이었다.

도움을 구하면 누구나 발벗고 도움을 주었고,그날같이 도움을 구하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도움의 손길을 주는 사람들을 정말 많이 만났다.


노크를 하니 ,연세드신 할머니가 나오셨다.

정말 친절하고 정이 넘치는 분이셨다.

언니가 발연고가 필요하다 그래서 약국을 찾았는데,직접 지도에 그림을 그려주며 알려주었다.

휴가중이라는 안내문과 함께 문이 닫혀있어 다른 약국을 찾았더니 직접 전화를 걸어 문이 열렸는지 여부를 알아봐 주었다.

내가 침대로 들어가다 머리를 부딪혔는데,그 모습을 보고는 침대 모퉁이를 때찌때찌하며 혼내주시기도 하여 너무 귀엽고 정겨웠다.

화장실 청소를 하시길래 도와드린다 했더니,극구 사양하셨다.

취침시간에는 일일이 돌아다니며 한사람 한사람에게 `부엔 까미노`하며 따뜻한 인삿말을 해주셨다.  



한방에 22명을 수용했는데,공간이 넓어 움직이기 편리했다.

무엇보다 철제로 된 침상이라 배드버그로부터 안전하다는 믿음이 있었다.

일인당 12유로였다.

우리말고도 한국인 순례자 여섯명이 더 투숙했다.


빨랫줄은 뒷문으로 나가면 바로 있었는데,집게가 바구니안에 가득하여 옷핀이 필요없었다.

햇볕이 너무 좋아 언제나 두세시간이면 뽀송뽀송하게 말랐다.

특히나 어딜가든 먼지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공기가 정말 맑았다.

 



와인축제중이라더니 곳곳으로 같은 복장을 하고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축제가 몇시부터 어디서 시작하는지 물었더니,다들 대답이 제각각이고 정확한 대답을 못했다.

그도 그럴것이 나중에 알고보니 거리 퍼레이드를 하는것이었다. 

그러니 정확한 장소와 시간을 말해주지 못했을것이다.


어느 가게 앞을 서성이니,와인을 한컵 따라주었다.

그리고는 머리에 기름칠을 하여 단정하게 뒤로 넘긴 한 분이 투명한 유리병에 나있는 긴 꼭지를 통해 와인을 마시는 시범을 보였다.

따라했는데,조준실패로 입주변이 벌겋게 되었다.


과일값이 정말 쌌다.

복숭아 두개,토마토,양상추,바게뜨빵,오이,물,자두..

이렇게 샀는데도 6유로가 안되었다.

과일주인은 좀 무뚝뚝했다.

숙소 가까이에 있어 나중에 한번 더 과일과 물을 사러 갔는데도 똑같았다.



저녁은 네델란드에서 온 샘과 같이 했다.

상을 차려놓고 막 먹으려던 중인데 주방으로 들어오는 샘과 눈이 마주쳤다.

너 우리랑 같이 저녁 먹을래?


샘은 부드럽게 넘긴 갈색머리와 눈웃음이 참 매력적이었다.

암스테르담에 사는데 우리더러 꼭 놀러오라고 했다.(전화번호도 안 알려주고..)

나도 한국에 놀러 오면 꼭 연락하라 그랬다.(전화번호도 안 알려주고..)

건강한 밥상이라며 아주 좋아하고 바게트에 올리브유를 발라 아주 잘먹었는데,고추장을 내밀며 매운소스라 했더니,

부인이 가나사람이라 매운음식을 아주 잘 먹는다 그랬다.

한국에 관한한 완전 문외한이었다.

면적이 얼마나 되는지,인구가 얼마나 되는지 하는 지리적인 질문을 많이  했는데,대답하려면 검색이 필요했다.

너 남편은 뭐하냐,아이가 몇이냐,궁금한것도 참 많았다.

매우 진지한 사람으로 보였는데,알고 봤더니 심리학 선생님이란다.

한번쯤 더 보고 싶었는데,로그로뇨 이후로는 통 볼 수 가 없었다.


거리로 나오니,마침 축제행렬이 지나가고 있었다.

광장까지는 거리가 멀어 포기하고 숙소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는데,때마침 걸려들었다.

그룹의 맨 앞에는 깃발을 든 사람이 있었고,그 뒤로는 마차탄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는 그룹마다 다른 색의 옷을 입을 사람들이 줄을 이었는데,남녀노소 구분없이 줄을 이어 걷고 있었다.

악기 소리가 우렁찼고 흥겨웠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연신 환호했고,그 사람들은 손을 흔들어 화답했다. 

박수치며 무슨 리듬을 맞추기도 했다. 






















그렇게 행렬은 무슨 체육관처럼 보이는 곳으로 운집했다.

이후부터는 입장권을 사야 들어갈 수 있었다.

몇몇 사람이 다가와 얼마에 입장권을 사라고 유혹하기도 했다.이름하여 암표상이었다.

바로 앞으로는 온갖 가죽제품이며 수공예 제품들을 파는 노점상들이 줄지어 있었다.

 



맥주를 마시며 축제분위기를 만끽했다.

워낙 사람들이 몰려 일회용 잔에 따라주고 있었다.



숙소 바로 앞으로는 bar가 있었는데,날이 어두워지니 음악소리가 점점 더 커져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궁금하여 밖으로 나가니,춤추고 마시고 난리도 아니었다.

 


축제 마지막날인 로그로뇨의 밤은 잠들지 않았다.

펑!펑!거리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났더니,축포소리였다.

밤 12시를 넘어서도 축포소리와 불꽃놀이는 멈추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깨어나 부스럭거렸는데,그 와중에도 바로 옆으로는 코골며 자는 사람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