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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산티아고 순례길

제9일 : 나헤라~산또 도밍고 데 깔사다(21km)



제9일 : 나헤라~산또 도밍고 데 깔사다(21km), 5시간 30분


2019년 9월 27일


오늘도 혼자 알베르게를 나섰다.

한낮의 강렬한 햇볕을 피하기 위해서는 새벽같이 출발 할 수 밖에 없었는데,문제는 어둠속을 혼자 걸어야 한다는것이었다.

나같은 길치는 알베르게를 빠져나와 까미노길 위에 서는것도 보통일이 아니었다. 

순례자들이 앞 뒤로 있을땐 괜찮은데,어느날은 아무도 없어 누군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리기도 했다.

알베르게를 막 나서니,호주에서 온 다이미엔도 막 나서려던 참이었다.

팔로우유 할테니,앞장서라 했더니만,되레 나를 따라 오겠단다.그러면서 `레이디 퍼스트`란 말까지 덧붙였다.참내..


마을을 벗어날때까지도 어둠은 채 가시지 않았다.

다이미엔은 랜턴이 없어 진짜로 내 뒤에 바짝 붙어 걸었다.

마침 내 앞으로 세명의 한국인 순례자들이 보여 걸음을 재빠르게 옮기면서 다이미엔한테 빨리 따라오라는 사인을 했다.  


동녘하늘 붉게 물들며 하루를 열고 있었다.

다들 걸음이 빨라 아침기온이 꽤 차가운데도 얼굴에선 땀이 줄줄 흘렀다.

다이미엔은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한국에서 왔다하니 폴란드 순례자와 마찬가지로 대뜸 `김정은`이야기를 했다.

트럼프와 마찬가지로 매우 크레이지한 사람이라며 손가락으로 머리를 가리키며 작은 동그라미를 몇개 그렸다.

방위비 이야기를 하면서 호주도 미국의 무기를 아주 많이 사들인다 그랬다.

다이미엔은 중간중간 내 영어발음을 친절하게 교정해주기도 했다.




공기가 정말 맑았다.특히 해뜨고 난 직후에는 순도 100%의 공기를 내뿜고 있었다.

햇살은 아홉시쯤 되면 바짝 내리쬐기 시작하여 10시를 넘어서면 이글이글 타올랐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늦어도 1시에는 걸음을 멈춰야 했다.

오후시간에 걷는건 정말이지 불구덩이속을 걷는거나 다름 없었다.

해는 밤 아홉시쯤 되어야 완전히 넘어갔다. 

 


나헤라에서 6킬로쯤 걸으니 마을이 나왔다.

주황색의 지붕들은 아침빛을 받아 더욱 붉어 보였다.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마을을 눈앞에 두고서도 한참을 걸었다.




bar에서 달콤한 휴식시간을 보냈다.

아침으로는 대체로 커피를 주문했다.

커피에 우유를 넣는다는 `까페 꼰 레체`였는데,bar마다 커피맛이 조금씩 달랐다.

커피와 우유와의 배합을 어떻게 하느냐였는데,나는 반반 정도의 배합이 딱 좋았다.

그리고 호호불며 마실 정도로 따뜻하게 나오는게 좋았는데,미적지근하게 나올때도 많았다.

설탕은 기호에 맞게 넣으라고 따로 나왔다.나는 언제나 설탕 한봉지를 다 넣어 마셨다.

탁자에 그냥 두어도 되는데,다 마시고나면 빈 잔을 화장실 가는길에 반납하곤했다.




저만치에 가고 있는 영훈이와 용수를 따라잡았다.

이젠 뒤태만 봐도 누가누군지 알아봤다.

엑스자로 팔을 휘두르며 가는 빨간 배낭은 용수였고,반바지 차림의 땅만보고 걷는 까만 배낭은 영훈이었다.

알베르게에서 나보다 더 먼저 나와 걷는 중이었다. 

기껏 따라잡았더니,왜 벌써 왔느냐며 쌍으로 타박을 준다. 



길 위에 서면 열심히 걷는일밖에 없었다.

보이는 풍경은 마을을 지날때 빼고는 별다른 특색이 없었다.계속 그늘없는 누런 벌판이었다.

색이 입혀져 있을 5월에 오면 초록빛 융단이 꽤 그럴싸할거 같았다.  

추수를 마친 벌판은 맨얼굴의 땅이었고,가끔 풀이 무성하여 초록빛을 낼 뿐이었는데,

토양의 색이 다양해 색깔별로 경계가 그어져 있었다.

작물에 따라 토양빛도 변하는건가?  




한무리의 자전거 팀이 `부엔 까미노`하며 인사하고 지나갔다.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멀리서도 위잉~하는 소리가 위협적으로 들렸는데,길을 비켜줄때마다 항상 감사하다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자전거가 다닐 수 있는 길이 따로 있었지만,까미노길과 겹치는 구간도 꽤 많아 보였다.

어느 구간은 걷다가 또 어느 구간은 자전거를 이용해 이동하는 순례자들도 있었는데,경석이는 악명높은 메세타 구간을 자전거로 이동했다.

걷거나,자전거를 이용하거나,중간중간 버스를 이용하거나,저마다의 순례 방법은 다양했다.

어디부터 걷고 어디까지 가는지,하루에 얼마나 걷는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다 각자의 방법대로 순례를 하면 되었다.

순례목적도 가지각색이었다.

나처럼 걷는걸 좋아하여 온 사람도 있었고,종교적인 이유로 온 사람도 있었다.

깊은 고민을 해결하러,삶을 뒤돌아보거나 미래를 구상하러등등..





며칠 새 바람결이 꽤 차가워졌다.

햇볕은 따가워 죽을 지경인데도 바람은 소슬바람이었다.

새벽녘에 걸을땐 손끝이 시려웠고,콧물이 나와 훌쩍훌쩍거렸다.



멋스러운 배경을 뒤로 한 넓은 공터에 아주 작은 bar가 차려져 있었다.

바나나 하나와 쥬스를 집어들고 도네티브했는데,금액이 성에 안찼는지 멀찌감치 떨어져 사진을 찍는데도 찍지마라며 거센 손짓을 보냈다.알아듣지도 못하는 말도 했다.

친절하고 온순한 스페인 사람들만 보다가 순간 마음이 퍽 상했다.

어디든 별의 별 사람이 다 있는거라며 스스로 위안했다.

가끔 불법으로 좌판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는데,뭔가 켕겨서 그런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얼른 잊고,얼른 길 위에 섰다.




주택가 울타리로는 순례길의 상징인 조형물이 많았다.

순례자들의 배낭에는 조가비가 상징처럼 매달려 있었다.

순교한 야고보의 시신을 불에 태워 바다로 보냈더니,그 배가 스페인 이베리아 해안에 닿았고,조가비들이 야고보의 시신을 보호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조가비는 순례자의 표식이며 산티아고로 가는 이정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주택가를 빠져나와 교차로의 왼쪽으로 나 있는 흙길로 들어서며 또다시 벌판과 마주했다.

저멀리 산이 있고,그 아래로 마을이 보였는데,그곳이 목적지였다.

 


나즈막하게 오르내림이 계속되었다.

전경이 탁 트여 거침이 없었고,경작지의 모습 또한 누군가 그림을 그려놓은듯 아주 멋졌다.

그렇게 단순하고 군더더기 없는 길은 무상무념으로 걷는다는게 딱 맞았다.

다른 생각들이 비집고 들어 올 틈이 없었다.

순례길은 생각을 단순하게 만드는 길이었다.

하루하루 의식주를 해결하며 걷는일 이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내 몸뚱아리 하나 잘 건사하여 산티아고 대성당까지 무사히 잘 걷는거 말고는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언덕을 하나 올라서면 또 다른 언덕이 보이기를 반복했다.

지평선 위로는 파란하늘이 위로 갈수록 짙어지며 무심히 바라보게 만들었다.

센치해지는 기분이 들면 마음이 약해질까봐 더 빠르게 속도내어 걸었다.

고르게 내뱉는 호흡보다 거친호흡이 몸과 마음을 더 역동적으로 만들어주었다.  



쉬운게 없었다.

마을이 지척에 있었지만,다가가기엔 정말이지 너무나도 먼 야속한 님이었다.

언덕을 오르내리며 마을이 보였다가 안보였다가를 반복했다.

그 아래로는 순례자들이 개미만하게 보였다.







한국인 순례자인줄 알고 `안녕하세요`했더니,대만인이었다.`니 하오`

루어는 생장에서부터 12일째 걷는 중이란다.

내일은 휴가가 끝나고 대만으로 돌아가야 해서 무척 아쉽다고 했다.

참 해맑아보이는 젊은 처자였다.


루어와 이야기하며 오는 사이 뒤따라오던 순례자 두명이 나를 추월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So fast~!`

통넓은 반바지를 입고 다니는 폴란스 순례자,막달레나였는데,여러번 만났었다.

늘 셋이서 나란히 걸었는데,오늘은 둘만 보였다.


산또 도밍고 깔사다 도착!

마을 이름은 왠만해선 쉽게 기억하지 못했다.

짧은 이름은 그래도 괜찮았는데,다섯글자가 넘어가면 입안에서 우물우물했다.

아는 사람을 만나 그날의 목적지가 어디냐 물으면 누구든 선뜻 마을이름을 바로 대지 못했다.

그냥 툭 던진 질문인데도 어느 순례자는 지도까지 꺼내며 성실하게 대답해주기도 했다.

다음날이 되어 마을을 떠날때야 비로소 입에 달라붙었는데,정작 가야할 마을은 또 우물우물거렸다. 

어쨌든..산또 도밍고 깔사다에 도착했다.

그리고 구시가지로 들어갔다. 








200명이상 수용할 수 있는 아주 큰 규모의 알베르게였다.

침대 하나당 9유로였는데,시설 또한 아주 훌륭했다.

침대는 방을 나누어 2층과 3층에 배정했고,2층에는 주방과 세탁실이 있었다.

주방이 아주 커서 많은 사람들로 붐볐는데,기름냄새가 진동을 했다.

순례자들이 많이 묵는 주방에서는 공용으로 쓰는 기기들이 한정되어있어 재빨리 쓰고 닦아놔야 했다.

오래 앉아 먹고 떠드는것도 큰 민폐였다.     



규모가 작은 알베르게는 대체적으로 침대며 화장실,그리고 샤워장의 남녀구분이 없었다.

그러나 규모가 큰 알베르게에서는 침대는 선착순으로 배정하여 남녀구분이 없었지만,

화장실이며 샤워장은 남녀를 구분했다.

화장실은 주로 `Aseo`나 ` servicio`로 표기 되어 있었는데,

산또 도밍고에 있던 알베르게 화장실에는 닭을 끌고있는 노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뜬금없다는 생각을 했지만,산또 도밍고 데 깔사다는 `수탉과 암탉의 전설`로 유명한 도시였다.

억울하게 죽은 아들이 산또 도밍고의 도움으로 기적적으로 살아났다는 뭐 그런 이야기..

대성당에는 실재로 닭 두마리가 한쪽 벽 위에 있다 그런다.

전설을 진작에 알았다면 대성당에 들어갔을텐데 못내 아쉽다.

기껏 3유로 때문에..

성당 입장료가 3유로였다.



씻고나면 맥주한잔 하는게 하루의 일과였다.

엔초비 꼬치가 그 날의 특별한 안주였다.

엔초비의 비린맛을 중화시키기 위해 메추리알과 올리브를 함께 꽨 조합이었다.

마지막 남은 두개를 마저 들고와서 한줄씩 더 먹었다. 


산또 도밍고 대성당은 한쪽 부분이 공사중이이었지만,외관이 무척 아름답고 고풍스러웠다. 

규모가 제법 커서 한눈에 다 안들어왔다.






골목풍경은 언제나 감성풍경이었다.

골목안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 한적하고 여유로운 모습들이었다.

창문에 내걸린 꽃 화분이 얼마나 여유로운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1층의 리셉션을 통하여 나가는 정원에 옷가지를 말렸다.

집게가 없어 옷핀으로 고정하였다.

빨래터가 바로 옆에 있었고,앉아 쉴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한켠에는 닭장이 있었는데,시도 때도 없이 꼬끼오~하며 울어댔다.

아주 정겨웠다.

그 후로도 농가마을을 지날때면 어김없이 닭울음 소리를 듣곤 했다.

 




어쩌다 만나는 DIA라는 대형 슈퍼마켓에서는 잘 구워진 닭을 팔고 있었다.

오직 그 슈퍼에서만 팔았는데,둘이 먹어도 다 못먹을 정도로 큰 통닭이 5유로도 안되었다.

육질이 정말 부드러워 몇번 씹지 않고도 부드럽게 넘어갔다.

매운 소스를 달라하면 따로 용기에 담아주거나 통닭위에 쫘르르 뿌려 포장해 줬다.


그 날의 저녁메뉴는 치킨과 피자였는데,영훈이가 불조절을 잘못하는 바람에 그만 피자도우를 새까맣게 태워먹었다.

주방가득 탄내가 진동을 해서 창문을 다 열어놨어야했다.

전자렌즈에 하려던 밥도 설정이 잘못되어 플라스틱 용기가 그대로 녹아버렸다.

뉴질랜드에서 외국인한테 머리까지 맞아가며 배웠다며 나름 요리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던 영훈이는 그 날 굴욕을 맛봤다.

다들 인정하고,본인도 나름 자부심이 있었는데,되는게 없던 날이었다.

귀염둥이 용수는 세상 사는 법을 잘 아는 아주 영리한 아이였다.

피자토핑만 걷어내 먹으며 풍미가 좋네 어쩌네 하며 형의 비위를 맞췄다.탄내를 풍미로 미화시켜 표현했다.

앞으로 영훈이가 만들어주는 고급 음식을 먹기 위한 고도의 생존전략이었다.   

안돼 보였는지 옆 테이블에 있었던 순례자가 감사하게도 피자 네쪽을 나눠줬다.

몸이 곤해 나만 신경쓰다보면 남이 눈에 잘 안들어오기 마련인데,그렇게 온정을 베푸는 순례자도 있었다.



조용했던 마을은 해질녘이 되어 사람들이 광장으로 모여들면서 왁자지껄해졌다.

저녁마다 주어지는 이 시간은 몸의 피로를 잠시나마 잊게해주는 윤활유같은 시간이었다.














침대에 누웠다가 신발을 어디에 두었는지 생각이 안나서 다시 1층으로 내려가 확인하고 나서 잠자리에 들었다.

어느 알베르게든 신발과 스틱을 한곳에 모아두게 했는데,스틱은 원통형으로 된 보관함에 한꺼번에 꽂아두었다.

인원이 적으면야 찾기 쉽겠지만,인원이 많으면 마구 뒤섞여 있는 통에서 내것을 찾는것도 보통일이 아니었겠다.

내 스틱은 휴대가 아주 간편한 3단 접이식이라 늘 배낭옆구리에 보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