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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산티아고 순례길

제8일 : 로그로뇨~나헤라(29.6km)


제8일 : 로그로뇨~나헤라(29.6km),6시간 40분


2019년 9월 26일


생각이 많은 아침이었다.

나 혼자 걸어야 하는 날이었다.

언니는 무릎상태가 안좋아 버스를 이용하여 나헤라까지 가기로 했다.

어쩌면 둘 다 모험을 하는 날이기도 했다.

 

배낭을 챙겨 카운터로 나가니,빵과 차가 놓여져 있었다.

빵 두개를 배낭에 넣어두고,아침으로 준비했던 빵과 쥬스로 요기를 하고 알베르게를 나섰다.  

도저히 어두운 새벽길을 뚫고 갈 자신이 없어 같은 숙소에 묵었던 순례자 두 분께 미리 부탁을 드려놓은 상태였다.

6시 반쯤에 출발하신다길래 10분전부터 문앞에서 배낭메고 기다렸다. 


길은 시내 중심가를 통하게 되어 있었다.

광란의 밤을 보냈을 광장에는 긴 호스를 이용해 물청소를 하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바닥이 반질반질해서 조금 미끄러웠다.

나같은 사람이 또 있는지,광장을 지날땐 순례자 몇이 까미노 시그널 앞에서 길동무를 기다리고 있었다.




날이 밝았다.

순례자들 뒤만 졸졸 따르다가 조금씩 속도를 내었다.

앞으로는 꽤 많은 순례자들이 걷고 있었다.

이제부턴 노란색 화살표를 잘 살펴보고 내 식대로 걷기만 하면 되었다.    



언덕을 돌아 내려서니 커다란 저수지가 나타났다.

잉어떼도 보였고,오리떼도 유영하고 있었다.


목제 다리를 건너며 공원으로 들어섰는데,제대로 가고 있는건지 알 수가 없었다.

사진을 찍느라 앞서간 순례자들을 그만 놓쳤는데,나를 보고 따라왔는지 뒤따라 오는 순례자들도 다 공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다행히 식수대 너머로 노란색 시그널이 보였다.

제대로 가고 있었다.



포도밭 사이로 난 길은 조금씩 가팔라지는 언덕길이었다.

아침햇살이 살포시 내려앉으며 까미노길이 눈부셨다.

하루 중,빛이 참 이쁜 시간이었다.

아침빛으로 물든 세명의 순례자들이 그림같았다.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새삼 언니의 빈자리가 느껴졌다.  





뉴욕에서 왔다는 탐아저씨 부부와 인사를 나눴다.

기억하기 쉽게 내 이름 `미숙`을 `미쉘`이라 지었더니,부르기도 쉬웠고 알베르게 예약도 아주 쉬웠다.

`미쉘 오바마`라고 말하고 내 남편이 `오바마`라 그러면 누구든 쉽게 기억했는데,

특히나 탐아저씨는 볼때마다 `미쉘 오바마`라고 불렀다. 


길이 두갈래로 갈라질땐 눈치껏 기다렸다가 따라가면 되었다.

바닥으로 선명하게 노란색 화살표가 있어 도로를 건넜다.



큰 와인병이 설치되어 있는걸 보니 와인회사인게 분명했다.

길에서 태어났다는 문구와 웹사이트 번호,그리고 웹사이트를 입력하고 산티아고로 가는 길을 공유하라는 광고판이 걸려 있었다.

산티아고까지는 576km만 더 걸으면 되었다.

한걸음 한걸음이 모아져 벌써 200km가 넘게 걸어왔다.


중간에 영훈이를 만났다.

그 어느때보다도 반가워서 폴짝폴짝 뛰었다.

처음으로 홀로 걷는 길,조금은 긴장했는데,동행이 생기니 너무 반가웠다.

나바레떼라는 마을에 있는 bar에 들어가 커피를 함께 마셨다.

바나나도 두개 샀다.


여언의 옷차림이 반팔에서 긴 팔로 바뀌어 있었다.

어제부터 아침 기온이 뚝 떨어져 숙소를 나올때면 한겹을 더 입었다.

저녁기온도 급격하게 떨어져 다운쟈켓을 입기 시작했고,장갑도 반장갑에서 긴장갑으로 바꾸었다. 

여언한테 어디까지 갈꺼냐 물으니 목적지가 같았다.



진정한 순례자의 모습으로 모델을 서달라 주문했더니만..ㅎㅎ

영훈이는 발바닥 물집을 끝날때까지 달고 다녔다.

매일아침 숙소를 떠나기전의 마지막 의식은 항상 똑같았다.

약을 바르고,밴드를 부치고,발가락 양말을 신고,또 양말하나를 더 신어야해서 언제나 다른 사람보다 늦게 출발했다.

아침만 되면 하루도 빠짐없이 버스를 탈까 걸을까를 고민했다.

내가 봐도 발상태가 말이 아니었는데,될 수 있으면 걷는걸 택했고 놀랍게도 잘 걸어냈다.

아침마다 고민하며 나약한 자신을 자책했는데,하도 여러번 듣다보니 지쳐서 나중엔 놀려대며 아예 들어주지도 않았다.

용수는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네 어쩌네 하며 형을 놀려댔고,

나는 `나약 이영훈 선생`이라 부르며 약올렸다.

시간이 갈수록 농담까지 할 돈독한 사이가 되어 있었다.




부산분들과 또다시 조우했다.

오늘은 처남분이 배낭을 메시고,매형분은 짐을 부치고 작은 배낭을 메셨다.

내 배낭을 볼때면 남자로서 조금 부끄럽다고도 하셨고,카메라 무게를 어떻게 감당하느냐며 혀를 내두르셨다.




또다시 햇볕과 싸워야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또다시 끝없이 펼쳐진 포도밭 사이를 걸어야 하는 시간이었다.

오른편으로 난 도로와 나란히 가는 길이었는데, 노란 들꽃이 양옆으로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먼저 도착해 영훈이와 부산분들 몫까지 오렌지 쥬스 네잔을 주문했다.

잘 생긴 청년이 정성스럽게 즙을 내리기 시작했다.

맛이 더 일품이었다.

뒤이어 도착하신 선생님이 저 청년 참 잘 생겼네~하시길래 쪼르르 달려가 `에스 무이 구아뽀`라 했더니 무척 좋아했다.






앞서가는 순례자가 무척 힘들어 보였다.

키가 꽤 큰데도 배낭이 머리위까지 올라왔다.

족히 13킬로는 되어 보였다.

`아 유 오케이?`

`노 프러블럼!`

대답을 듣고도 전혀 노프러블럼으로 보이지 않았다.추월하며 보니 티셔츠가 젖어 있었다.





포도밭길 사이의 시골길을 걷다보니 마을이 하나 나왔다.

등산화를 벗고 한숨 쉬다 다시 걸었다.

마침 영훈이와 예약해놓은 숙소가 같아 걸음을 같이 했다.






이번 구간은 전체적으로 포도밭이 많았다.

80퍼센트 정도가 포도밭 사이로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포도밭-마을-포도밭-마을-포도밭-마을이 반복되었다.적당한 거리에 bar가 있어 휴식하기에도 좋았다.

포도를 한송이 따서 먹으며 걸었다.포도알이 이전것보다 훨씬 컸다.

먹을수록 과즙이 마구 터지며 달콤했다.






어느 포도밭에서는 큰 트럭을 세워놓고 포도를 수확하고 있었다.

트럭 가득 넘쳐 바닥에도 여러송이 떨어져 있었는데,한송이 집어 먹었더니 당도가 확실히 급이 달랐다.

 


농장 주인이 지나가는 순례자들한테 잘 익은 포도를 하나씩 따서 나눠주고 있었다.

도대체 오늘 포도를 몇송이를 먹는건지..

나헤라까지 얼마나 남았냐 물었더니 바로 눈앞에 보이는 마을이라 그랬다.

그러면서 4킬로 정도밖에 안남았다 그랬다.

 

나헤라는 손에 잡힐듯 가깝게 보였는데 무려 한시간이상을 더 가야했다.

시야가 너무 좋아 생기는 착각은 그 후로도 계속 되어 어떨때는 짜증이 막 밀려오기도 했다.

어떤 구간은 가까워지기는커녕 점점 더 밀려 나가는 착각을 불러 일으키기도했다.

꼭 신기루를 보는것 같았다.




염소수가 없는 우물물..

먹으란 뜻인지,먹지 말라는 뜻인지..



나헤라 주택가로 진입했다.

예약한 알베르게는 구시가지에 있었다.

입구에서 영훈이를 기다렸다.

길눈 어두운 나를 위해 영훈이가 앞장서 길을 안내했다.

약속한것도 아니었는데 예약해 둔 알베르게가 나랑 같은 곳이었다.






나헤리야 강을 건너 구시가지에 이르니,저만치에 언니가 보였다.

왠 스페인 할아버지와 함께였는데,나중에 알고보니 로그로뇨에서 함께 버스를 타고 왔다 그랬다.

마침 나헤라에 사는 분을 만나 이곳까지 동행하여 함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보자마자 격하게 반기며 격한 포옹을 하셨다.

내 친구 도와줘서 무차스 그라시아스~~

우리는 서로 걱정하고 있었다.

나는 혼자서 버스 타고 올 언니를 걱정했고,

언니는 혼자서 걸어 올 나를 걱정했다.

둘 다 무탈하게 상봉했으니 이걸로 되었다.




알베르게 앞에 우리를 딱 모셔다놓고는 쿨하게 사라지셨던 나헤라 할아버지..


8인실에 일인당 10유로 하는 알베르게였는데,일회용 침대시트와 베개시트를 제공했다.

조금 늦게 도착했던 순례자들은 15유로하는 단층침대를 배정했다.

누울곳만 있으면야 어디든 감지덕지였다.

10유로에 잠자고 씻고 먹을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는것만도 감사한 것이었다.   




씻고나면 언제나 맥주한잔은 기본 코스였다.

딱히 안주도 필요없었다.갈증해소만 하면 되었는데,딱 한잔이면 족했다.

맥주를 주문하면 사이즈를 고르고,물한병을 사도 언제나 사이즈를 말해야 했다.

`빼께뇨`...작은 사이즈로..

그리고 또 하나,물을 구입할땐 가스가 들어있는지 없는지를 꼭 확인해야 했다.

어느날은 가스가 들어있는 물을 사는 바람에 뚜껑을 돌리자마자 치익~하고 넘쳐흐르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슈퍼가 시에스타에 걸려 닫혀있는 바람에 쉬며 기다릴곳을 찾다 중국음식점으로 들어갔다.

 새우볶음밥을 시켰는데,양이 무척 많았다.

오랜만에 본 쌀알이 반가워 한접시를 꾸역꾸역 다 먹어치웠다.

원래 알아두었던 슈퍼는 끝내 열지 않았고,그 옆으로 난 골목을 따라 올라갔더니 DIA라는 큰 슈퍼가 있었다. 





시장만 봐주고 상차리는건 아이들한테 시켰더니,다들 수준급 요리사였다.

경석이는 고기굽기 전문이었다.

기름을 살짝 두르고 재빠르게 육즙이 빠지지않게 노릇노릇하게 구워냈다.

영훈이는 무슨 플라스틱용기를 이용해 렌즈밥을 했고,

용수는 형들 옆에서 보조역할을 아주 충실히 했다.


밥과 고기가 있는 아주 근사한 밥상이었다.

고깃값이 정말 싸서 야채와 과일,그리고 다음날 먹을 간식까지 하여 토탈 2만원도 안되는 금액으로 다섯이서 아주 만끽하며 먹었다.


저녁을 먹고나면 항상 마을산책을 했다.

해가 길어 8시반이 넘어야 해가 완전히 지곤 해서 저녁시간이 여유로웠다.

성당에도 들어가보고 이 골목 저 골목 누비기도 했다.

큰 광장에 있는 마을에서는 그들의 광장문화를 체험하기도 했다. 






성당에 들어가니 미사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미사를 마치자 신부님이 순례자들만 따로 단상으로 불러 모으셨다.

영어로 통역해주는 분이 계셨는데,신부님이 성당의 유래와 성당의 조각작품들을 하나하나 스페인어로 설명하시면 옆에서 동시통역해주었다.

이러나 저러나 못알아먹기는 매한가지였는데,분위기가 매우 엄숙해서 경청했다.



한사람씩 돌아가면서 종을 세번씩 치며 소원을 빌게 하셨다.

그런 다음엔 사무실로 자리를 옮겨 은색의 목걸이를 하나씩 나눠주셨고,

한사람 한사람의 머리를 인자하게 어루만지며 `부엔 까미노`하며 기도해주셨다.

특별한 경험이었다.신부님의 손길이 내 머리에 닿았을땐 하마터면 눈물도 날뻔 했다.

신의 축복을 듬뿍 받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성스러운 자리에 입고 갔던 옷은 하필 후줄근한 바지와 목늘어진 반팔 티셔츠였다. 


손톱이 웃자라 있어 바짝 깎아냈다.

시간은 참 잘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