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일 : 산 마르띤 델 까미노~아스또르가((24km),5시간 30분
2019년 10월 9일
길동무없이 혼자 걷는 날이었다.
시간을 최대한 늦춰 짐을 꾸렸는데도 여전히 날이 어두웠다.
7시 반쯤되어 숙소를 나가 누군가 오기를 기다리는데,마침 저만치에 랜턴빛이 보였다.
보스턴에서 온 merc였다.
`나,너 따라갈래
오케이~`
이 후,merc와 아스또르가까지 동행했다.
어둠속을 걷다 길을 잃고 헤매는 외국인 순례자를 만나 동행하다 걸음이 안맞아 얼마안가 헤어졌다.
분명 오른쪽으로 들어가라는 사인이 있는데 길이 막혀있더란다.
둘이 머리를 맞대고 지도를 한참이나 보더니만,까미노 시그널이 없는 도로 바로 옆길이라 확신했다.
다행히 알마안가 화살표가 나왔다.
신통도 하지..이러니 나같은 방향치는 어두울때 혼자 걸으면 큰일난다.
동이 트며 너른 들판위로 붉은 빛이 번지기 시작하고 하늘은 코발트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셔터를 눌렀더니,밧데리가 들어 있지 않았다.
충전기에 그대로 둔 채,짐을 꾸렸던 모양이었다.
나 때문에 시간이 지체될까 싶어 날이 완전히 밝을때까지 merc와 걸음을 맞추다,
그림자가 아주 길어진 다음에야 배낭을 내려놓고 밧데리를 장착했다.
날이 밝았으니 먼저 가라했더니만,괜찮다며 기다려 준 merc.
merc는 참 감성적인 사람이었다.
정원에 핀 꽃 한송이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고,향기 좀 맡아보라며 불러세웠다.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면 소리를 들어보라며 귀에 손을 갖다대기도 했다.
merc가 적당히 걸음을 멈춰 풍경을 즐기는 덕분에 나는 사진 찍을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고,
사진을 찍기 위해 내가 멈춰서면 차분히 옆에서 기다려 주어서 따라 잡으려고 서둘러 뛰어가지 않아도 되었다.
걸음도 나랑 아주 딱 맞아 오늘 제대로 임자 만났구나~싶었다.
첫번째로 만난 bar에서 커피를 시켰는데,과연 유리컵 한가득 넘치도록 아주 뜨겁게 나왔다.
먼저 도착한 한국인 순례자 몇몇이 커피 인심이 후할꺼라고 미리 귀띔해 주었었다.
그러면서 엄청나게 뜨거우니 조심해야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애교있게 막대 사탕도 하나 놓여져 있었다.
뒷뜰에 있는 정원은 참 넓었는데,하얗고 까만 닭들이 노닐고 있었다.
가끔 꼬끼요~하고 울기도 했는데,merc는 닭울음소리를 `코커두들두`로 표현했다.
하트모양의 쎄요가 이뻐 merc에게도 권유했더니,쎄요를 찍고나서 방명록에 흔적을 남겼다.
멋진 중세 다리를 건너면 오스삐딸 데 오르비고란 마을이었다.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를 쓸때 영감을 받았다는 중세의 다리는 스페인에서 가장 길고 오래되었단다.
폭이 꽤 넓은 곡선의 다리가 마을까지 이어졌다.
알베르게 방향을 알려주는 이정표..
어제 좀 무리하여 두 호벤들을 따라 이곳까지 왔으면 좋았을껄 하고 잠깐 후회를 했다.
선택할 수 있는 알베르게도 많고 무엇보다 마을이 참 예뻤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달리했다.
그곳에서 안묵었다면 쾌활했던 그 여주인도 젠틀한 merc도 못 만났을 것이다.
순례길에서는 다 공평하게 나누어 즐거움과 감수할 만큼의 불편함을 주고 있는것 같았다.
참 정갈해 보이는 마을이었다.
바닥은 다리에 박혀놓았던 그 문양 그대로였는데,어쩜 그리도 단단하고도 반질반질한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담벼락도 예사롭지 않게 꾸며놓은 알베르게가 많아 보는 재미가 솔솔했다.
GOD가 묵었다던 산미겔 알베르게는 내부가 궁금할만큼 아주 멋스러웠다.
merc도 아기자기한 장식에 관심이 많아 연신 손으로 가리키며 사진을 찍으라했고,흥미로워했다.
그러면서 마을을 걸을땐 주민들을 위해 조용히 걸어야 한다고도 했다.
깊이 동감했다.
1킬로쯤 시골길을 걸으니 또 마을이 나왔다.
거기서 다음 마을까지는 2킬로,또 거기서 그 다음 마을까지는 또 2킬로 남짓이었다.
마을이 자주 나오는 날은 지루하지 않아 걷기가 좀 수월했는데,들판은 물론이고 마을에도 인적은 거의 볼 수 없었다.
꿈꾸는듯 조용한 마을에서 만나는 담벼락 풍경들은 마치 광고세트장을 지나는듯 했다.
이런곳에 살면 다 이런 감성이 생기는건가??
마을을 벗어나니,황량한 길이 시작되었다.
바닥도 아주 고르지 않았고,은근하게 오르막이 이어졌다.
축산농가에서 나는 소똥 냄새도 아주 지독했다.
대지는 점점 뜨거워지기 시작했고,발바닥도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차가 다니지 않아 바닥이 고른 찻길로 걷고 싶었지만,merc를 따라 울퉁불퉁한 돌길을 걸었다.
괜히 어글리 코리안이란 인식을 심어주긴 싫었다.
merc는 일부러 나 듣기 좋으라고 그랬는지는 몰라도 아시아인중에 한국사람이 가장 친절하다 그랬다.
이번 마을만 지나면 8킬로 정도를 더 가야만 마을을 만날 수 있어,bar에서 받았던 막대사탕을 먹으며 의자에 앉아 좀 쉬었다.
merc가 초코바를 하나 줬는데,입이 깔깔하여 배낭 벨트주머니에 넣어 두었다.
조금씩 고도를 높이는 구간이 나타났다.
걸을때마다 먼지가 푸석거렸고,목도 좀 칼칼했다.
얼른 올라칠 생각으로 속도를 바짝 내어 걷고 있는데,갑자기 뒤에서 merc가 뛰기 시작하며 내기를 걸어왔다.
지기 싫어하는 나의 승부욕을 자극했는데,온 힘을 다해 나도 뛰기 시작했고,결과는 당연히 나의 승리로 끝났다.
앞서가던 순례자들은 나에게 박수를 쳐주었고,merc는 승복했다.
그 후로 있었던 또 한번의 오르막 레이스에서도 나는 절대 봐주지 않았다.
내가 너보다 젊거든~~ㅎㅎ
적당히 진지하고,적당히 위트 넘치는 merc가 참 좋았다.
올리브 나무가 끝없이 펼쳐지는 언덕길이었다.
다른날보다 오르내림의 강도도 좀 높았고,길이 거칠어 한걸음씩 디딜때마다 구르는 돌을 조심해야만 했다.
엄마와 아들이 내 앞으로 걷고 있었다.
참 보기 좋았지만,이 고된길을 아이가 걷는다는건 참 쉽지 않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배낭엔 기타도 하나 매달려 있었다.
사실 나도 오카리나를 가져올까도 했었는데,진작에 관뒀다.
각 나라의 순례자들과 어울리는 자리에서 한곡 멋있게 뽑으면 폼날거 같아 6개월간 배워봤는데,
영 실력이 늘지 않았다.
예술(?)의 한계를 느끼고는 이내 포기했는데,그러길 참 잘했다.
그런 자리가 많이 주어지지도 않았을뿐더러 그것조차 짐이었다.
어느 날은 밀밭이 끝도 없이 이어지고,또 어느 날은 옥수수밭이 끝도 없이 이어지더니,오늘은 또 올리브 나무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참 다양도 하고,뭐든 한번 나타나면 끝장을 보고야 마는 아주 화끈한 순례길이었다.
얼굴은 햇볕에 따꼼따꼼 거리고,발바닥도 화끈화끈하여 아주 죽을 맛이었다.
독수리가 날아간다며 하늘을 가리키더니,
또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린다며 소리를 좀 들어보라는 merc...
참 감성적이고 섬세한 구석이 있어 무슨 예술을 하는 사람인가 했더니만,식품회사 CEO였다고 나중에 영훈이가 알려줬다.
듣고보니 또 그렇게도 보였다.
요기하며 좀 쉬었음 좋겠는데,merc는 쉴 생각이 없었다.
배낭 옆구리에 있는 무화과를 꺼내 달라길래 내 배낭이 무거우니 내 복숭아를 나눠먹자 했더니만,
하나 건네받고는 그대로 먹으면서 걸었다.
쫀심에 쉬자는 말도 못하고 참..
키가 크니 걸음도 성큼성큼 아주 시원하게 걸었다.
정말 황량한 돌길이었다.
혹시 올리브가 잘 자라는 지질조건이 돌이 많고 건조한 곳이 아닌가 생각했다.
돌이 많으니 아예 돌로 이집트 기호같은 그림까지 그려놓았다.
무슨 뜻이 있는건가?
도네이션으로 운영되고 있는 노점을 만나면 기분이 좋아졌다.
같은 값이면 이렇게 운영되는게 순례자 분위기도 내고 참 좋은 시스템인거 같았다.
누구든 욕심내어 먹는 사람은 없어 보였고,
되레 먹는값보다 더 많이 기부를 하는것 같았다.
merc는 또 안찍겠다는걸 빨간색으로 그려진 하트모양 쎄요를 보여주며 부추겼더니,수첩을 꺼내왔다.
소나무숲길이 한참이나 계속되더니,눈앞으로 십자가상이 하나 보이고 그 너머로 드디어 오늘의 목적지 `아스또르가`가 나타났다.
다 온 줄 알고 둘이 박수를 마주치며 기쁨의 샴페인을 터뜨렸는데,알고보니 4킬로도 넘게 더 가야만했다.
발아래 마을을 보고 다왔다고 착각했던 적은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게 다 마음이 몸보다 항상 앞섰기 때문이었다.
그냥 지나치지 않는 정많은 merc..
발아래로 펼쳐진 아스또르가는 꽤나 컸다.
`산 후스또 데 라 베가`라는 마을을 지나야 도착할 수 있었다.
순례자상 앞에서..
참 신기했다.
손에 닿을듯 가까워 시가지를 지나는줄 알았는데,생뚱맞게도 시골길이었다.
강을 건너니 화살표는 왼쪽을 가리켰고,곧 철길이 나타났다.
철길 위에 난 다리는 일직선으로 놓여진게 아니라 지그재그로 하여 오르내리게 만들어 놓았는데,적어도 200m는 넘어 보였다.
쿵쿵거리는 소리가 아주 요란했는데,순례자들을 마주볼 때마다 서로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세명의 순례자가 교차로에서 어디로 갈지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merc가 지도를 꺼내 확인하더니 왼쪽으로 꺾었다.
역시 믿음직한 친구..
아주 가파르게 올라서니,저만치에서 언니가 마중나와 있었다.
오늘도 내가 알베르게를 못찾을까 염려되었나보다.
그러다보니,마을입구에 도착하면 언제나 언니가 저만치에 있겠거니~하며 언니부터 찾았고,
언니는 어김없이 나와 나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원래 예약했던 사립알베르게를 취소하고,공립알베르게로 갔다.
베드버그가 많고,한국인 순례자들한테 아주 불친절하다는 후기가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취소전화를 했더니 기분이 나쁜지 내 이야기를 다 듣지도 않고 뚝 끊어버렸다.안가길 잘했다.
몇유로 더 주고라도 될 수 있으면 사립알베르게로 가곤 했는데,비싸다고 다 좋은건 아니었다.
어느곳은 공립알베르게가 훨씬 더 훌륭했다.
무려 156명이나 수용하는 `뻬레그리노스 씨에르바스 데 마리아`란 공립알베르게는 일인당 5유로였다.
두사람이 앉아 아주 체계적으로 접수를 받고 있었고,접수가 끝나니 또다른 한명이 안내를 했는데,
어설픈 스페인어 몇마디에 아주 반색하더니만,나더러 이곳에서 일을 하란다.
한국인 순례자들을 응대하는 보직을 주겠다고...
침대까지 따라와 무슨 사진을 보여주며 블라블라블라~~~
참내..별일을 다 겪는다.
화장실과 샤워실은 남녀공용이고 칸도 많지 않았지만 아주 깨끗했고,배정받은 방은 볕이 아주 잘들어 베드버그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가장 압권인건 테라스에서 바라보는 풍광이었는데,마을이 한눈에 다 들어왔다.
여덟명이 한 방을 썼는데,merc도 같은 방에 배정되었다.
씻고 나와서는 서로 못알아보고 긴가민가하며 서로 멀뚱멀뚱 쳐다봤다.
마을 하나를 더 간다던 영훈이와 용수도 그곳에 함께 묵었다.
뛰어봤자 벼룩이라며 놀렸더니,용수가 감기기운이 좀 있단다.
타일로 유명한 스페인인 만큼 타일로 된 기념품이 참 많았다.
어느 쥬얼리가게는 온통 타일장식을 하여 멋스럽게 꾸며놓기도 했고,
어느 알베르게는 타일장식으로 문패를 만들어 걸어놓기도 했다.
광장으로 나가 점심으로 뿔뽀(문어요리)를 먹었다.
원래는 간단하게 요기만 할 생각으로 자리에 앉았는데,
종업원이 오더니만 새하얀 식탁보를 먼저 쫙~깔고 나이프와 포크 셋팅을 다 한 다음에 메뉴판을 보여줬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음료만 주문할꺼라는 타이밍을 그만 놓쳐버렸는데,
맥주한잔 달랑 마시고 나오기엔 너무 황송한 셋팅이라 할 수 없이 노선을 바꿨다.
어리숙해 보이니 일부러 그런건가??
주변테이블엔 맥주하나에 따빠스하나 놓고 잘만 마시고 있는데..
암튼지간에 뿔뽀요리를 먹어 볼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고,
나는 꼭 먹어봐야 할 음식목록을 또 하나 지울 수 있었다.
폭신한 감자위에 문어를 얹어 고춧가루를 뿌려 나왔는데,꽤 맛있었다.
감자와 문어와의 조합이 근사했고,문어도 아주 부드러웠다.
샐러드는 말할것도 없고 바게뜨는 정말 고소하여 자꾸 뜯어먹었다.
아무래도 난 스페인 스타일인가벼~~
스카웃제의도 받았겠다,취직이나 할까보다..
언니는 한 술 더 떠 알베르게를 하나 차려 아예 눌러앉고 싶단다..ㅎ
테라스에서 바라보는 전경이 아주 끝내줬다.
어느 순례자는 아예 바닥에 누워 햇볕을 쬐며 전망을 즐기고 있었다.
누가 옆으로 지나다니거나 말거나 심취해 있었는데,그 자유로움이 참 보기 좋았다.
저녁은 레온에서 사두었던 라면을 끓여 삶은 달걀과 함께 먹었다.
테라스에서 멋진 조망을 앞에두고 먹으니 라면맛도 남달랐다.
짜파게티 한봉은 승훈이한테 주었다.
음식이 너무 안맞아 하도 힘들다 하여 주었더니,정말 맛있게 먹었다.
그러고나서는 비빔장이며 봉지커피,그리고 비타민제등 배낭에서 자꾸 뭘 꺼내 나한테 줬는데,
오늘부로 순례길 포기하고 내일은 한국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안타까웠다.
체력을 길러 나중에 결혼할 여자와 함께 다시 오겠노라~했는데,
위험한 생각이라고 극구 말리고 싶었지만,겉으로는 너무 좋은 생각이라며 호응해줬다.
누가 그러는데,애인이랑 둘이 왔다가 찢어져 여자가 혼자 돌아갔다고 했다.
너무 힘든 길이다보니 민낯뿐 아니라 자칫하면 밑바닥까지 드러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다시 시청사 건물이 있는 광장으로 나갔다.
아스또르가에서 놓치면 안되는 건축물이 두개 있었는데,
바로 아스또르가 성당과 가우디가 건축한 주교관이었다.
광장에서 골목길을 통해 약 10여분은 족히 걸어가야 있었다.
드디어 바로 앞으로 성당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앞에 딱 나타난 산타 마리아 대성당과 주교관..
아주 멀찌감치 떨어져야 한눈에 들어왔다.
가우디 건축물은 거의 직선이 존재하지 않는다 했다.
그래선지 견고한 화강암으로 둘러싸여 있음에도 아주 온화한 느낌이 들었다.
보띠네스 저택에 이어 두번에 걸쳐 가우디를 만난 셈이었는데,가슴 벅찰만큼 뜻깊은 경험이었다.
사방으로 둘러보고나서도 좀처럼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숙소로 들어가기 전,아이스크림을 하나 물고 성곽 주변을 산책했다.
오후빛 스며든 마을이 너무 근사하여 추워질때까지 어슬렁거렸다.
여유있게 사진을 찍고,여유있게 호벤들과 장난치며 놀았다.
이런 시간이 나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에 오늘도 감사해했다.
해가 완전히 넘어가고 어두워져서야 숙소에 들어가 침낭속으로 들어갔다.
내일은 37.5km..
해발 1,500m까지 고도를 올려야하는 악명높은 철의 십자가 구간이 기다리고 있었다.후덜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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