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일 : 레온~산 마르띤 델 까미노(25.8km),5시간 40분
2019년 10월 8일
하루 푹 쉬고 나니,몸은 가뿐한데 마음이 느슨해져 일어나기가 좀 힘들었다.
다시 또 어둠속에서 짐을 싸고,주방에 선 채로 꾸역꾸역 빵을 먹고 6시에 알베르게를 나섰다.
감사하게도 용수와 영훈이가 문 앞까지 와주어 함께 출발했다.
대도시에서는 노란색 화살표를 찾기가 쉽지않아 일단은 방향을 잡고 가다가 바닥이든 건물을 잘 살펴야 한다.
군데군데 일정한 가격으로 그려져있는 까미노 사인을 따라가기를 1시간 반,그제야 시가지를 다 빠져나온듯 주변이 휑해졌다.
여러명의 순례자들이 한 방향으로 걸었는데,갈림길이 있거나 바닥이 고르지 못한 곳에서는 멈춰서서 무언의 사인을 보내고 나서야 걸음을 옮겼다.
어느 순례자는 배낭에 불을 하나 달아놓아 뒤에 오는 순례자를 배려했는데,참 가슴 뭉클한 온정 넘치는 모습들이었다.
두 갈래길이 나왔다.
왼쪽으로 급하게 꺾어지는 길은 내가 가야할 산 마르띤을 지나쳐 곧장 오르비고로 가는 길이었고,
도로옆으로 난 길로 가야 오늘의 목적지를 갈 수 있다는데,아주 좁은 갓길에 씽씽 달리는 차들이 많아 여간 신경쓰이는게 아니었다.
시 외곽의 공장지대라 유난히 트럭들이 많아 소음도 심했다.
용수는 이 길에서 아헤스부터 썼던 나무 지팡이와 작별을 했다.
하도 닳아 점점 높이가 낮아져 있으나 마나한 스틱이 되어 있었다.
드디어 오늘부로 남은 거리는 200km대로 진입하게 됐다.
그동안 무심했던 이정표에 새겨진 숫자가 오늘따라 더 눈길이 갔다.
바닥은 자갈이며 큰 돌맹이들이 많아 끊임없이 발바닥에 통증을 가했다.
순례길은 어느 한구간이라도 녹록지 않았다.
레온에서 13킬로 걸어왔고,산 마르띤 델 까미노는 12킬로 남았으니 반은 넘게 걸어온 셈이다.
왠일인지 두 호벤들은 bar를 그대로 통과해 전투적으로 앞서 나갔다.
갈길이 멀다는 뜻이겠지..
나보다도 8킬로를 더 걸어 오스삐딸 데 오르비고까지 가겠다 했는데,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그곳에 바로`함께 걸을까?`라는 프로그램에서 GOD가 묵었던 알베르게가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33km라니..
도로와 나란히 하는 흙길은 똑바로 이어졌고,풍경변화는 없었다.
추수를 마친 쓸쓸한 들판,드문드문 서있는 나무,그리고 먼지나는 새하얀 길..
순례길의 낭만은 없고,그 위를 걸어가는 순례자의 뒷모습만이 가장 아름다운 길이었다.
까미노는 도로와 조금 떨어져 계속하여 나란히 이어졌다.
앞뒤로 우리 말고는 사람하나 보이지 않더니,저만치로 새벽에 bar에서 만났던 화가팀 3인방이 걸어가고 있었다.
어쩐일인지 점점 순례자들의 모습이 뜸해졌다.
참 친절한 순례길이다.
하다못해 자판기에도 방향표시를 해놓았다.
검정옷으로 개비한 두 호벤..
레온에서 아주 저렴한 가격에 득템했다고 자랑했다.
난 뭘 사고 싶어도 들어갈 공간이 없는뎅..
배낭에 들었던 물건중에 한번도 안쓰고 도로 가져왔던 물건이 몇개 있었다.
선글라스와 해외전용 멀티플러그,그리고 챙이 넓은 모자와 버프였는데,
멀티플러그는 버릴까말까를 몇번이나 고민하다 결국은 끝까지 짊어지고 다니다 집으로 도로 가져왔다.
메모하겠다고 가져갔던 수첩과 볼펜도 사용하지 않았다.침대에 누워 휴대폰에 있는 메모장을 사용하면 그만이었다.
욕심을 조금 버렸다면 최소 2킬로 정도는 짐을 줄일 수 있었다.
목적지까지 5킬로 구간은 가도가도 끝없이 옥수수밭이 펼쳐졌다.
백두산 가는길에 보았던 만주벌판의 광활한 옥수수밭을 보는듯했는데,
바로 옆으로는 차들이 아주 살벌하게 씽씽 달렸다.
점점 햇볕이 강해지고 지칠즈음,산 마르띤 델 까미노에 도착했다.
등산화는 먼지가 하얗게 앉아 캠프라인 로고가 잘 안보였다.
언니가 마을입구에 나와 손을 흔드는데,공사중인 인부들도 손을 막 흔들었다.
나한테 손짓한다는걸 모르고 착각한 모양이었다.
너무 배가 고프고 갈증도 심해 알베르게를 가기전에 bar부터 들렀는데,
종업원은 손님이 바로 앞에서 빤히 쳐다보고 있는데도 급할거 하나 없었다.
나중에 과일이랑 빵을 사러 왔을땐 10여분넘게 전화를 하고 있어 참을 수 없을 정도였다.
우리나라 같았으면 손님 앞에두고 뭐하는 짓이냐며 큰소리한번 치고 나왔을 상황이었지만,아쉬운건 나였고 이곳은 특유의 느긋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스페인이었다.
순례길은 무수히 많은 인내심을 요구했고,아울러 마음을 비우는 연습을 하게 만들었다.
맥주 한잔에 또르띠야를 먹고나니 살만해졌다.
언니가 남긴것까지 싹 먹어치웠다.
일단은 배가 불러야 마음도 편해지고 여유를 갖게 된다.
알베르게(라 까사 데 베르데)는 8유로에 여덟명이 쓸 수 있는 곳이었다.
사워실이 바로 침대앞에 있어 무척 편리했는데,화장실은 복도를 지나야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주인이 오지 않아 체크인도 하기전에 맘대로 침대 차지하고,씻고,빨래까지 마쳤는데,
건조대가 있는 정원문이 아무리 밀고 잡아당겨도 안열려 화장실에 나 있는 창문을 통해 넘나들었다.
한참 후에야 아주 예쁘장하게 생긴 주인아가씨가 나타났는데,말이 정말 많아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여권번호 쓰다말고 수다 한판,이름 쓰다 말고 또 수다 한판,쎄요까지 찍는데만 족히 20분이나 걸렸다.
쎄요를 찍고나서는 그 마을을 대표하는 꽃이라며 도장옆에 예쁜 꽃그림도 그려주었다.
한국말은 딱 세마디 알고 있었다.
`안녕하세요,신발은 저기에,반가워요.`.
스페인어의 `r`발음을 이야기하며 갑자기 `r`로 시작되는 단어 배틀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혀를 아주 심하게 떠는 `따르릉`할때의 그 발음과 같아서 단어 하나씩 말할때마다 서로 배꼽을 잡았다.
음식점,옷,무릎,맛있다,빨갛다,빨리빨리.....
정원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하몽맛 나는 과자를 먹었다.하몽맛이 크게 나지 않아 평범한 프링글스 맛이었다.
다음날 묵을 숙소를 예약하고,다음 구간을 훑어보고,낮잠도 한숨 잤다.
워낙 작은 마을이다보니 상점이나 슈퍼가 전혀 없었다.
달랑 집만 몇채 있을 뿐이었는데,거의 인적이 없었다.
그래서 생긴 알베르게 시스템이 정말 재밌었다.
냉장고안에는 맥주와 요플레 그리고 간단히 렌지에 데워먹을 수 있는 즉석식품이 몇개 들어 있었고,
복도쪽으로는 찬장처럼 생긴 공간에 와인과 컵라면등이 비치되어 있었는데,
알아서 꺼내먹고,제품에 매겨져있는 금액대로 알아서 돈을 넣는 일종의 무인판매 시스템이었다.
주인아가씨가 하나하나 설명하며 액션을 취하는데,너무나도 실감나게 연기를 해서 계속 웃음이 실실 나왔다.
좀 부지런해보이지는 않았다.
빨래터옆에 다 세탁된 빨랫감이 대야 가득 쌓여있는데도 개와 놀기만 할뿐 널 생각을 안했다.
도와준다하니,괜찮다며 놔두란다.
볶음라면과 즉석식품으로 저녁을 먹고 마을을 산책했다.
한바퀴 돌아봤자 10분꺼리도 안되었다.
왠 동양아줌마 둘이 일몰사진 찍겠다고 카메라들고 볶아치니,
아저씨 한분이 자기네집 계단을 올라가도 된다하는데,난간이 없어 좀 무서웠다.
일몰은 별 볼일 없었고,풍성하게 열린 포도송이만 눈에 들어왔다.
친절한 마을주민과 함께 인증샷~~!
옷차림하고는...ㅎㅎ
가볍고 편하면 그만이다.
가기전에 명동 지하상가에서 만원주고 산 바지였다.
여덟개의 침대가 놓여져 있는 방엔 언니랑 나,그리고 외국인 남자 순례자 한명뿐이었다.
만약 언니가 없었음 조금 멋쩍은 상황에 놓여질뻔 했다.
앞으로 아주 작은 마을에 묵을땐 이런 상황을 염두해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홉시도 안되어 소등을 하는 바람에 강제취침 당하고,
휴대폰 밝기를 최대한 어둡게 놓고 한참을 만지작거리다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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