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둘째날
(장터목에서 대원사까지)
산행이야기:세찬 바람을 뚫고 구만리나 떨어져있는 화장실 가기가 엄두가 안나,꾹꾹 눌러참으며,담요 돌돌말고 꼼지락거리고 있는데,위층 제석봉실에서 전갈이온다.일출봐야하니,5시30분까지 취사실로 내려오라신다.대체 이 날씨에 일출은 무슨 얼어죽을?? 대장님의 명이니,군말없이 짐챙겨 내려가 하늘을보니,역시나 먹구름이 가득하고,하늘엔 별하나 없고,눈보라도 장난아니다.
어제 먹다남은 밥과 된장국으로 아침을 먹는데,사단이 벌어진다.
밥한술을 딱 넣는순간,가슴이 턱 막혀오고,순식간에 식은땀이 쫙 흐른다.
대장님이 등 두드리고,지압까지 해주시는데도 체증이 내려가지 않는다.
찬바람한번 쐬고난 후,그래도 먹어야겠기에 또 한술 떠먹는데,도저히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내키지않는맘으로 천왕일출을 보러가려니,지리산신령이 노하셨나보다.
결국,따끈한 물한잔으로 속을 진정시키고 거의 빈속으로 천왕봉을 오른다.
오를수록 점점 붉은기운이 올라온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출을 볼 수 있겠다는 기대감에 부풀어오른다.
제석봉을 지나면서는 하늘이 점점 붉게 타오르기 시작하고,천왕봉이 바로 코앞에 보이기 시작하자,
구름사이에 숨어있던 햇님이 슝~하고 올라온다.
와~~3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천왕일출을 보는구나..
불난듯 활활 타오르는 천왕일출앞에 서니, `여기`가 벅차오른다.
하얀눈썹 껌벅거리며 산지사방을 내려다보며,환희에 차오른다.
자연의 아름다움앞에서 그 무슨 표현이 필요하랴..그냥 가슴이 뜨거워진다.
얼굴을 강타하는 눈바람에 몸이 휘청거리면서도 무려 30분을 넘게 정상에 머물며,
두번다시는 못볼지도 모르는 이 멋진순간을 눈으로 가슴으로 카메라안으로 꼭꼭 담는다.
천왕봉 1950m
바람따라 구름이 춤을추며 넘실거린다.
아무것도 안보였다가도,저아래 마을까지 훤히 보여주기도한다.
순간순간 변하는 기막힌 풍광에 손끝이 아려와도 참고 버티다가 볼따구가 아파와서 억지로 내려간다.
계획대로 대원사로 방향을 잡는데,먼저 내려가던 두 분이 러셀안된 눈길에 쫄아서 발길을 돌려 다시 올라오신다.
지난번에 큰S님이 죽다살아났다는 그 구간? 어디한번 나도 죽다살아나볼까나..
초반부터 쭉쭉 미끄럼타고 내려가기 시작하고,자빠지고 꼬꾸라지고를 반복한다.
앞에서 대장님이 러셀을 해주시고,그 발자국만 따라 걷는다.
중봉
다섯겹이나 껴입었는데도 워낙 기온이 차니,왠간해선 땀도 안난다.
휴대폰밧데리도 오락가락 제멋대로고,눈꽃에 정신팔린 내 정신도 오락가락하고,
아직까지 체증이 가라앉지않은 내 뱃속도 정신이 하나도없다.
조망이 아름다운 중봉에 올라,두루 살펴본 후,치밭목으로 향한다.
중봉 내려오자마자,발을 헛디뎌 허벅지까지 쑥 빠져버린다.
허우적거릴수록 더 깊이 빠지고 결국은 `헬프미`를 외치고,
대장님이 붙들고 끄집어 내주시는바람에 겨우 목숨(?)을 건진다.
그 와중에도 기념으로 남겨야한다며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찍어대는 못된심보..
복수의 기회포착을 위해 열심히 뒤만 쫓는데,
이후에도 두어번 자빠지고 꼬꾸라지고,또 허벅지까지 빠져 `살려달라`애원하고..
하여튼 오늘,눈속에 여한없이 파묻혀보는 날이다.
천왕봉을 출발한지,1시간 30분만에 치밭목에 닿는다.
요기좀 하고 가려는데,여전히 안땡긴다.
순간,퍼뜩 떠오르는거 하나..달착지근한 황도..딱 그거하나 땡긴다.
4천원주고 하나 사서 먹는데,얼마나 맛있는지,없던힘이 샘솟는다.
산장지기님의 커피보시로 온몸이 훈훈해지고,
걸쭉한 사투리로 풀어내는 산중에피소드로 잠시 쉬어가는 시간이 즐겁다.
30여분을 푹 쉬며,다시 에너지충전을 하고,기나긴 계곡길로 들어선다.
대원사
대원사에 도착해 주차장으로 내려가는데,딱딱한 시멘트길을 밟으니,발바닥에 열불이 난다.
나,자연으로 돌아갈래~~
2시30분 버스타고 원지까지 이동하니,그제서야 쫄쫄 굶었던 뱃속에서 신호가오고,
모범음식점에서 갈치조림을 참으로 맛나게 먹는다.
4시20분버스타고 서울오는길,온몸이 몰랑몰랑해지며 이완되면서 잠이 솔솔온다.
겨울지리산은 나에게 멋진풍광으로 기쁨을 안겨주었다.
때론 세찬 눈보라로 노하게 했고,
가슴떨리는 설레임을 주었고,
좋은이와 함께걷는 동행의 즐거움을 주었다.
겨울지리산은 우리네 인생사처럼 희노애락을 다 가지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