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 둘째날
(중청-희운각-공룡능선-마등령-소공원)
일행들은 벌써 다 떠났는데,나만 혼자 남아 죽어라고 신발끈을 매고 있다.
뜻대로 신발끈은 잘 매어지지 않고,배낭은 널부러져 있고, 마음만 조급하고 되는 일이 없다....
새벽녘에 잠깐 잠들었는데,그마저도 꿈속에서 산행준비하느라 애만 태우다 잠이 깼다...
외설악 방향으로 잔잔하게 구름바다가 펼쳐져 있는 아침..
암봉을 휘감아 도는 역동적인 모습은 아니어도,기대하지도 않았던 아침풍경은 충분히 감동적이다.
5시가 다 되어도 일어날 생각을 안하는 두 분을 깨워 떠날 채비를 한다.아침은 희운각에서 먹기로 하고...
점봉산 방향..
구름속에서 햇님이 쏘옥 올라오고 나서야 산장을 떠난다.
그래도 아쉬워 자꾸만 뒤돌아보며..
소청갈림길로 내려서며 또 한번 한참을 머무른다.
구름바다가 붉게 물들때까지 서성인다.
뒤돌아보니 대청봉에서 중청에 이르는 라인이 아침햇살로 곱게 물들었다.
바람꽃 필 무렵 다시 또 와야지..
뾰족 솟은 암봉들 아래로 펼쳐진 운해는 희운각으로 내려설때까지도 사그라들지 않고,
골사이로 쏟아지는 빛내림을 감탄하며 바라본다.
(산앵도나무)
계곡물이 없어 생수 몇병을 사야하나 싶었는데,다행이 희운각 대피소 마당 수도꼭지에선 물이 충분히 나온다.
시장이 반찬이라고..소세지구이와 함께먹는 누룽지 미역국은 당연히 꿀맛이다.
두그릇만 먹어야지 했는데,먹다보니 세그릇..왠지 든든하게 먹어둬야 할거 같다.
여유있게 모닝커피도 마시고..몰래 숨어 양치도 하고..썬크림도 얼굴에 찍어 바르고..
물보충도 충분히 하고..
죽으나 사나 함께 가시겠다는 약속을 저버리고 결국 천불동으로의 하산을 결정하신 미스타리..
이리하야 생애 처음으로 공룡구경에 나선 한선수님과 함께 공룡능선으로 향한다.
신선대
무수한 암봉이 바라보이는 신선대에 선다.
울산바위 방향으로는 아직까지도 운해가 남아있다.
후끈거리는 날씨에 본격적으로 공룡의 등뼈를 밟기도 전인데 벌써부터 진이 빠지지만,
일년을 기다려 보고 싶은 꽃을 볼 생각에 흥분되기도 하다.
제일 먼저 난쟁이붓꽃을 만난다.
고산의 세찬 바람을 이겨내기 위해 최대한 몸을 낮춘 현명함이라니...
지금부터는 꽃담느라 시간이 지체될테니 각자 자기 걸음대로 가기로 한다.
1275봉쯤에서 만나기로 하고...
두번째로 만난 꽃,금강봄맞이...
신기하게도 작년에 피었던 그 때 그 자리에 똑같이 귀엽고 앙증맞게 피어있다.
어김없이 바위틈을 둥지삼았다.
세번째로 만난 꽃,설악솜다리..
예전엔 설악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던 꽃이 지금은 이곳에나 와야 볼 수 있는 귀한꽃이 되었으니..
어쩌면 이 험준한 공룡능선이 이 꽃을 보호해 준 셈이 되었다.
등로주변으로는 잘 볼 수 없어 작년에 식겁하고 내려온 적 있던 그 바위를 또 올랐다.
신선대에서 잠깐 인사 나눴던 부산어르신과 서울아주머니가 식겁하며 올려다본다.
개체수가 훨씬 많아졌지만,아직 햇살이 들지않았다.
무서움도 잊고 바위에 달라붙어 있다가 막상 내려가려니 좀 긴장된다.
후끈 달아오른 길..
물을 아무리 벌컥대도 갈증은 해소되지 않는다.
산도 꽃도 다 더위에 지친듯 축 늘어져 있는듯하다.
1275봉 오름길에 이르러서야 한선수님을 만난다.
오르막이든 내리막이든 평지든 같은 속도의 한결같은 새색시걸음이다.
반면에 나는 한걸음이라도 줄여보려고 성큼성큼 걷다가 헥헥대며 주저앉아 쉬고,
또 두리번거리며 걷다가 되지도 않는 꽃사진 찍는답시고 헥헥대고 그런다..
아직 힘이 남으셨는지 `에델바이스`를 잉글리쉬로 열창하시기까지..
난 숨 쉴 기운조차 없고만..
지금 한창인 금강봄맞이..
꽃들을 만나는 순간만큼은 잠시나마 더위도 힘듦도 모두 잊는다.
1275봉 아래 배낭을 벗어던진다.
아직 점심때가 안되어 조금 더 진행하기로 하고 아껴뒀던 참외를 하나씩 베어문다.
그리고 한선수님께는 염치없지만 물보시를 받는다.1.5리터나 되었던 물이 벌써 반이나 줄었으니...
바람이라도 시원하게 불어 땀 좀 식혔음 좋으련만,한낮으로 치닫으며 더위는 한여름인양 기승을 부린다.
어제부터 앞서거니 뒤서거니하며 걸으셨던 어르신..
조심스레 연세를 여쭈니 82세라고...오마이갓~~!
지금까지 공룡능선을 80번도 더 오셨을꺼라고..그야말로 설악역사의 산증인이시다.
나이는 그저 숫자에 불과하다는것을 보여주신다.
이제 그만 걸음에만 열중해야지~하면서도 자꾸만 시선이 가는 설악솜다리..
현기증이 날 정도로 바위에 달라붙기를 여러번 반복한다.
차곡차곡 포개놓은듯한 바위들..
그 누가 이렇게 정교하게 쌓을 수 있을까..
오랜시간 쌓이고 깎이기를 반복하며 만들어진 자연작품을 경이롭게 바라본다.
하루종일 신비스런 분위기를 보여주는 울산바위..
울산바위만 보면 영화 `또하나의 약속`의 첫장면이 생각난다.
뜨겁게 달아오른 바위를 힘겹게 오른다.
까마득히 보이는 대청봉을 바라보며 한걸음 한걸음의 힘이 참 대단하구나~하고..
(큰앵초)
마등령을 지나 긴 내리막을 차분히 내려선다.
빨리 통과하고 싶은 마음에 늘 빠른걸음으로 내달렸는데,오늘만큼은 한선수님 걸음에 맞춰 나도 새색시걸음으로 걷는다.
그래서인가,산행시간은 길어졌어도 발바닥에 느껴지는 피로감이 훨씬 덜한거같다.
신흥사 입구 청동불상 앞을 지나며 한선수님이 묻는다.
지금 누군가 일억을 준다면 왔던 길 다시 돌아갈 수 있겠냐고..
내가 미쳤냐 때려죽여도 못간다고 답한다.
하지만..몇일 지나면 내 돈을 들여서 또 오고 싶어질껄!!
땀냄새 풀풀 풍기며 소공원에 도착하니,미스타리님이 카니발 대기시켜놓고 기다리고 계신다.
이 몰골로 버스 갈아타가며 한계령까지 이동하지않아도 된다는게 얼마나 감사한지..
온천에서 뽀송뽀송하게 때빼고 광내고 나서 미리 맛집까지 검색해놓으신 센쓰라니..
저녁먹고나니 언제나처럼 기분좋은 노곤함이 마구 몰려온다.
아무래도 지금 누군가 일억 준다면 왔던 길 다시 갈 수도 있을거같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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