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북알프스 (3)
호다카다카 산장에서의 아침이 왔다.
극도로 피곤했는데도 깊은 잠을 잘 수 없었는데,나 뿐 아니라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고 했다.
자고 싶은데 못자는건 정말이지 고문과도 같은 일이었다.
내집만큼 편안한 곳이 어디 있으랴~~
창문이 붉게 물들어 마당으로 나가보니,입이 떡 벌어지는 아침풍경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천지가 개벽할듯한 엄청난 장면은 그 어느 때 맞이했던 아침보다 장엄하고도 황홀했다.
운해는 골마다 물결치듯 넘실거렸고,하늘색은 뭐라 표현할 수 없을만큼 오묘했다.
서둘러 2층으로 올라가 일행들을 몰아치듯 깨웠다.
사방이 온통 붉은 색으로 불타오르는 아침이었다.
산장의 창문도 산도 바위도 사람들도 온통 붉었다.
붉게 타오르는 하늘은 신비로움과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히늘의 붉은 기운이 조금씩 사그라들면서 또다른 풍경을 선사했다.
골마다 햇살이 드리우기 시작했고,마치 바다 한가운데 있는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산장식으로 아침을 먹었다.
정갈한 식단은 오늘도 눈으로만 먹어야했다.
일행들은 아직 배가 덜 고파봐서 그렇다고 했지만,낯선 음식에 대한 거부감은 하루 아침에 고칠 수 있는게 아니었다.
밥과 함께 미소시루만 연신 입에 떠넣으며 배를 꽉꽉 채웠다.
다시 또 길을 이어야 할 시간이 어김없이 다가왔다.
황홀한 아침을 맞이해서였는지,몸은 새로운 에너지로 완벽하게 충전된 느낌이었다.
잠자리가 편해서였는지,몽몽님 컨디션도 아주 좋아보였다.
무슨 복인지,흐릴꺼라는 예보와는 달리 날씨 또한 환상적이었다.
초장부터 빡세게 유격훈련으로 시작했다.
바위와의 씨름은 어제부로 끝난 줄 알았는데,큰 오산이었다.
산장을 발아래 두고 거의 직벽으로 기어올라야했다.
바위틈 생명들이 눈부신 자태로 피어있었다.
바람꽃에서부터 이름모를 앙증맞은 야생화들을 바라보는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오늘은 불편함을 감수할 각오하고 카메라를 목에 걸었다.
동그라미 그려진 길따라 걷는 길..
뒤로 야리가다케의 봉우리가 빤히 보였고,조금씩 고도를 높이는 너덜길은 징글맞게도 계속 나타났다.
그래도 설악산 황철봉만큼은 아니라고 입을 모았다.
언제 다시오랴 싶어 멀어져가는 야리가다케의 뾰족한 봉우리를 연신 뒤돌아봤다.
햇살받은 근육질의 연봉들은 강인해 보였고,저 길을 어떻게 걸어왔을까 정말 꿈만 같았다.
오쿠호다카다케 3190m
그러니까 북알프스의 최고봉이자 일본에서 세번째로 높은 봉우리였다.
동쪽방향으로 후지산이 보인다던데,구름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고,남알프스의 연봉들만 구름위로 펼쳐졌다.
가야할 길,미리 가늠해 보시는 큰형님..
바로 앞의 칼등을 넘어야하는건 아닌지 걱정했는데,다행히 산허리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산길은 언제나 조화로웠다.
거친 산길 전투적으로 걷다가도 꽃들이 나타나면 마음은 따뜻하고 부드럽게 순화되었고,
잠시나마 쉬어갈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주었다.
공존과 관용을 베푸는 자연앞에서 숙연해지는 시간은 걷는내내 계속되었다.
한시도 마음을 놓아서는 안되는 길이 이어졌다.
조금씩 고도를 낮추면서 길은 급격하게 내리꽂혔다.
무거운 배낭만 아니었더라도 조금 수월하게 내려설 수 있는 길도 배낭무게 때문에 뒷걸음질을 해야했다.
세상에는 눈으로 다 볼 수 없는게 많다.
가슴으로도 다 담아 낼 수 없다.
눈앞에 보여지는 감동적인 풍경들을 잊지 않으려 머릿속에 깊게 각인시켰다.
칼날능선을 걸을때보다는 한껏 여유가 생겨 이따금씩 나타나는 보라색 꽃과 자주 눈맞춤했다.
다케사와 방향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이 바위 가득 꽃처럼 피어있었다.
급격하게 떨어지는 직벽을 보니,긴장감 백배였다.
마에호다카다카부터 다케사와 산장까지는 아찔한 직벽의 연속이었다.
몇일전,추락사가 있었던 지점을 통과하는 곳이라 더욱 긴장하며 쇠줄을 잡고 내려섰고,
미끄러운 바윗길을 통과할땐 손아귀가 아플만큼 홀더를 꽉 잡았다.
날씨복은 끝까지 있었다.
끝까지 오버트라우저와 고어텍스 점퍼를 꺼낼 일은 없었고,축복된 날씨속에 걷게 된걸 감사하고 또 감사해 했다.
발아래 빨간 지붕의 다케사와 산장이 보이자,마음은 한층 여유로워졌다.
시원한 생맥주 들이킬 상상만하며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나무들이 조금씩 나타나며 그늘이 생기기 시작했고,여기저기서 귀에 익은 새소리도 정겹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다케사와 산장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나라 돈으로 9천원 정도하는 생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해발 2,000m높이에서 마시는 생맥주인데다가 큰형님이 쏘시는 맥주라 더욱 꿀맛이었다.
어제 그제 한번도 느끼지 못했던 식욕까지 막 샘솟기 시작하면서 입맛도 되살아났고,
쏙 들어갔던 뱃살은 라면 두그릇으로 다시 뽈록해졌다.
이제야 웃음찾은 몽몽님..
산중에서 한번도 입에 못댔던 알콜을 연거푸 벌컥거렸다.
풍혈
맑디맑은 계곡물길 따라 편안한 걸음이 이어졌다.
마음은 한없이 평화로워졌고,무사히 마쳤다는 안도감은 가슴 벅찬 감동으로 다가왔다.
가미코지를 출발한지 삼일만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12시부터 온다는 비는 여전히 내리지 않았고 오히려 햇살만 눈부셨다.
테라스가 있는 예쁜 건물이 눈에 들어와 하룻밤 가격을 물으니 일인당 30만원에 가까운 어마무시한 금액이었다.
히라유온천장까지 가네마네 하다가 다시 야영장에 텐트를 치기로 했다.
눅눅했던 침낭과 매트를 널어놓고 일인당 600엔씩하는 목욕탕에 들어가 간만에 뜨신물로 몸뚱아리를 씻어내고나니,그제야 다들 사람같아졌다.
모처럼 야영장에서 여유있는 시간을 보냈다.
개울가에 모여앉아 커피도 마셨고,식당에서 카레를 먹으며 생맥주도 한잔씩 했다.
긴장이 풀리면서 온몸이 욱신거렸지만,마음만은 너무도 가벼웠다..
다음날..언니를 깨워 아침산책길에 나섰다.
묘진이케 가는 길위로 새들의 노랫소리 가득했고,물 위로 물안개가 신비스럽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행운의 무지개까지 아침하늘 위로 그려져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만난 일곱색깔 무지개였다.
아마도 이번 여정이 무지개빛 행운이었다는걸 그렇게 보여주는듯 했다.
짐을 꾸려 가미코지 터미널로 내려가 신시마시마역까지 가는 셔틀버스를 탔다.
다시 신시마시마역에서 마쯔모토역으로...
그리고 다시 나고야역으로...
환승은 순조롭게 이루어졌고,2시쯤 되어 드디어 나고야 시내에 입성했다.
도요코인 호텔에 배낭을 맡겨놓고 나고야역에서 두 정거장 떨어진 사카에역까지 걸었다.
젊은이들 붐비는 번화한 거리에서 쇼핑도 하고,다코야끼도 먹고..
다시 나고야역으로 돌아오니,술마시기 딱 좋은 시간이 되었다.
언니가 찜해뒀던 `쯔꾸네야`는 이미 만석이라,나고야의 명물 `테바사키`를 먹기 위해 또 다른 유명 맛집인 `세카이노 오지이상`을 찾아갔다.
일본술과 맥주를 번갈아 마시고,이런 저런 안주꺼리들을 골라 먹으며 기분좋은 뒷풀이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잠자리에 들자마자 누가 업어가도 모를만큼 정말 간만에 꿀잠을 잤다..
두고두고 잊지못할 5박 6일간의 여정이었다.
계획대로 무사히,작은 사고 하나없이 마칠 수 있었음에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축복받은 날씨속에,처음부터 끝까지 환상의 조합을 이루었던 사람들이 있어 가능했던 여정이었다.
끝없이 펼쳐졌던 천상의 화원,
야리가다케 정상에서 넘실거리던 구름바다,
너무나도 야성적이었던 칼날능선,
호다카다케 산장에서 맞이한 장엄한 일출,
그리고,청정했던 계곡과 그 아침 맞이했던 물안개와 무지개..
어느새 추억이 되었지만,아주 오랫동안 그리움과 감동으로 남아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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