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산티아고 순례길/산티아고 순례길

제17일 : 떼라디요스 데 로스 뗌쁠라리오스~엘 부르고 라네로(30.6km)


제17일 : 떼라디요스 데 로스 뗌쁠라리오스~엘 부르고 라네로(30.6km),6시간 30분


2019년 10월 5일


무려 30km를 걸어야 하는 날,숙소마저 정해지지 않아 불안한 마음에 평소보다 더 일찍 일어났다.

어두운 조명아래서 침대에 걸터앉아 딱딱하여 잘 씹히지도 않는 빵과 바나나를 꾸역꾸역 먹고 있는 내 모습을 보니,더없이 처량해보였다.

내가 왜 이곳에 와서 이러고 있을까? 도대체 까미노가 뭔데??

 

5시 출발..

어두운 복도를 지나 신발을 찾으러 나가다 화들짝 놀랐다.

신발장 앞에서 누군가 침낭을 돌돌말고 자고 있었다.

같은 방을 쓰는 사람의 코고는 소리를 참지 못해 뛰쳐나온게 분명해 보였는데,짐작컨대 레오네오와 같은 방이 아니었나 싶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날도 추운데 복도까지 나와 자고 있다니..

오세브레이로 알베르게에서는 침대 매트리스를 들고 장애인 화장실에 가서 자는 사람도 있었다.  

다행히 나는 잠귀가 아주 예민하지 않아 그 어느 알베르게에서도 그런대로 잘 잤다.

예민했다한들 어떻게든 적응했을것이다.   


정문이 닫혀있어 뒷문으로 가만가만 빠져나왔다.

마을을 빠져나와 도로와 나란히 걷다가 아스팔트길과 흙길을 번갈아 걸었는데,까미노 표시를 잘 살펴야만 했다.

혼자 걷고 있던 일본인 순례자는 길을 놓쳐 헤매다 우리를 만났는데,맥이 완전히 풀려 있었다.

나는 길에 관한한 천하무적인 두 호벤이 있어 길잃을 염려는 조금도 없었다.

어느 날은 다른사람들은 다 까미노 표시를 따르는데,우리만 구글지도로 다른 방향으로 가기도 했다.   


 작은 마을 두곳을 지나서야 사아군에 도착했다.여전히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시간이었다.


사아군은 꽤 큰 도시인데도 아무리 뒤져도 문을 연 bar가 없어 난감했는데,

영훈이가 뭘 검색하더니 곧바로 문을 연 곳을 찾아냈다.하여간 신통도 하다.

커피한잔에 크로와상 하나씩 주문했다.

갓 구운 빵이 얼마나 맛있는지 새벽부터 식욕이 막 돋았다. 




꽤 유서깊은 중세도시라는데,구석구석 살펴볼 겨를도 없이 마을을 빠져나갔다. 




떠나온 이유는 대단하지 않아도,걷다보면 꽤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례에 큰 뜻이 있는것도 아니었고 그냥 단순히 걷는것에 관심있어 온 길인데,걷다보면 아주 거룩한 발자취를 따라 걷는 느낌이 들었고,

종교인이 아닌데도 성당에 들어가면 없던 독실함까지 생길 정도로 진지했다.

복음을 위해 걸었던 야고보의 신성하고 거룩한 까미노는 나에게 있어 마음을 단련시키는 길이었다.




안개가 자욱하여 시야가 무척 흐렸고,안개비도 소리없이 내렸다.

계속하여 풍경변화가 거의 없는 똑같은 길이 이어졌다.

도로와 나란히 하는 흙길에는 가로수가 촘촘히 심어져 있었는데,한도 끝도 없었다.

가도가도 똑같은 풍경이었는데,허허벌판을 걸을때와 마찬가지로 무척이나 지루했고,발바닥도 아팠다.





마을이 나타나자 서서히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파란하늘이 번지기 시작했고 햇살도 막 비집고 나왔는데,또다시 뜨거운 햇볕과의 싸움이 시작된다는 뜻이었다.

  


그늘있어 좋다 했지만,울퉁불퉁한 흙길에 답답한 가로수가 계속되니 힘들기는 매한가지였다.

흙길 버리고 찻길로 걸으면 속도도 나고 발이 좀 편했다.다만 차가 오는지를 계속해서 주시해야만 했는데,풀이 까칠해 넘나드는것도 일이었다.



까미노에서는 콜라 한잔도 아주 폼나게 주었다.

콜라를 주문하면 캔하나와 얼음과 함께 레몬이 든 컵을 따로 주었다.

잘 즐겨하지도 않던 콜라를 까미노 위에서 참 많이도 마셨었다. 

걸으면서 마셨던 콜라 양은 오십평생 마셨던 양을 훨씬 능가했을 정도였다.





걸음이 무거워지는 한계점은 대체적으로 20km쯤이었다.

25km가 넘어가면 배낭무게가 고스란히 온몸으로 느껴졌고,

30km를 넘어서면 정신을 완전 무장해야 걸을 수 있었다.

순례길은 장기전이어서 무리하거나 욕심내면 안되었는데,마을과의 거리가 마땅찮을땐 어쩔 수 없이 긴 거리를 걸어야만 했다.

그렇다고 너무 느슨하게 구간을 짧게 하면 긴장감이 떨어져 계획대로 다 걷지 못할 수도 있었다.

아무리 트래킹에 가깝다해도 매일같이 낯선환경 속에서 걷는다는건 보통일이 아니었다. 




산티아고 대성당까지 367km..

목적지까지 절반을 넘게 걸어왔다.

그러나,여전히 367km란 숫자는 가닿을 수 없는 요원한 거리 였다.

과연 내가 무탈히 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은 매일같이 들었고,

어느 날은 하루 빨리 시간이 흐르기를 바랬다.



자전거로 순례중인 학생들이 내일까지 레온에서 무슨 축제를 한다는 정보를 주고나서 `부엔 까미노!`하고 떠났다.

휘리릭 눈앞에서 금세 사라졌고,나는 또 고전하며 걸었다.




출발한지 6시간 30분을 열나게 걸어 도착한 엘 부르고 라네로..

용수는 뭔 배짱인지 13km나 더 떨어져 있는 렐리에고스라는 마을까지 더 가고 싶어했다.

그래야 내일 일정이 조금이라도 수월해질꺼란게 이유였는데,13km를 더 가자고라??

더이상 걷고싶은 마음은 코딱지만큼도 없는데도 조금도 지기 싫은 마음에 큰소리치며 오케이를 하고는 뒤에 오는 영훈이에게 바통을 넘겼다.

다행히도 STOP을 외치는 영훈..

땡큐,영훈..니가 날 살렸다.








언니가 먼저 도착하여 침대 4개를 잡아 놓았는데,주인은 아주 친절한데 시설이 완전 열악하다는 정보를 미리 주었다.

이국만리에 와서 그저 등짝 누울곳만 있으면야 더 바랄것이 없으니,자리가 있다는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숙소 주인은 어찌나 바쁜지 한참을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아 샤워먼저하고 빨래를 했다.

주인장은 아주 어수선하고 아주 정신없어 보였다.

뭐가 그리도 바쁜지 벨을 눌러도 한참 후에야 나타났고,카운터에 앉아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어제 전화를 아무리 해도 받지 않았던 이유를 알 수 있었는데,정원 옆으로 난 좁은 문을 통해 연신 들락날락 했다.

아마도 거기가 가정집이었던 모양이다.

언니가 다음날 이용할 기차시간을 물어보기 위해 슈퍼에 갔더니, 거기서 또 슈퍼 어르신과 수다를 떨고 있었다. 


빨래는 정원 한켠에 있는 빨래터를 이용했다.

물이 하도 차가워 대충 비누칠을 하고 뒤적이다 휑궈냈는데,배수상태가 안좋아 애를 먹었다.

주인은 대야를 이용하여 헹군다음 정원 아무데나 물을 버리라는 시늉을 했고,

이불빨래를 걷어들이며 내가 빨래를 널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주었다. 

뭐든 빨리 하려다보니,어느 날은 마른 옷가지에서 비누흔적이 남기도 했는데,

그냥 무덤덤하게 쓱~닦아내고 입으면 그만이었다.

 


마을을 걷다 한국어로 된 간판을 발견했다.

신라면 3.5유로,햇반 4유로..

까미노를 찾는 한국인이 얼마나 많으면 이런 간판까지 걸어놓았을까?

글쎄 메뉴판까지 한글로 하나하나 친절하게 설명해 놓았다.

하긴..나같은 사람까지 올 정도니뭐..

 


얼큰한 라면국물에 새하얀 밥을 먹고 싶었지만,참았다.

7.5유로는 너무 비쌌다.하루만 참으면 레온에 도착할테고,거기에 중국인마트가 있어 아주 저렴하게 살 수 있다고 한다.

익숙한 라면 대신 익숙하지 않은 현지 음식을 선택했는데,완전 대박이었다.

언니랑 나는 계속하여 `께리꼬,께리꼬(맛있다,맛있다)`를 외쳤고,배가 부른데도 요리 하나를 더 주문해 간만에 만끽하며 먹었다.







저녁은 화기를 사용할 수 없는 주방이라 즉석식품으로 대신했다.

예약하기전에 주방이 있다는 표시가 있어도 화기가 없는곳도 많았고,심지어 수저나 포크가 없는곳도 있었다.

쓰고 남은 식재료는 다음 사람들을 위해 두고 가기도 했는데,양념이며 쌀을 아주 요긴하게 쓰기도 했다.


저녁노을이 참 예쁜 날이었다.

해지고 난 후의 골목풍경도 너무나도 고요했다.











혼자 할 수 없어 두 호벤들의 도움을 받아 유심칩을 새것으로 교환했다.

바늘로 콕 찔러 꺼내서 갈아끼우기만 하면 되는줄 알았는데,이것저것 누르며 꽤 복잡한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연결이 됐다.

내 손에는 스마트폰이 들려 있어도 문맹인이나 다름없었다.

까미노 지도를 다운받아 왔지만 볼 줄도 몰랐고,구글지도는 아예 켜지도 않았다.젬병이라 아예 시도조차 안했다.

문자나 주고받고,몇가지 검색을 하고,까미노 필그림을 보며 구간공부를 하는게 다였다. 


내일은 레온까지 37km..후덜덜~~